철두철미, 핵심찌르는 직관

깔끔한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부드러운 말씨와 정연한 논리….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처음보는 사람은 그의 귀공자풍 외모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얼굴도 54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童顔)이다. 노동부 장관 시절 너무 깔끔한 이미지 때문에 노동계에 거부감을 줄 우려가 있다고해서 한때 양복대신 작업복 상의를 입고 다닐 정도였다.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인상만으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엘리트 관료」로 치부하곤 한다.그러나 이수석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뜻밖에 「가난으로 인한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 이수석은 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부유했다. 할아버지가 목포에서 멸치젓 공장을 운영했는데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그러나 조부가 돌아가신후 집안은 급속히 몰락했다. 그래서 소년 이기호는 중 2때부터 「입주 과외」로 집안의 생계를 뒷받침할 수밖에 없었다. 입주과외는 고3때까지 이어졌다. 이수석은 『집안이 너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할 생각을 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그런 어려움을 겪고 성장을 한 탓인지 그는 역대 어느 노동부 장관보다도 친 노동자적 성향이 강하다. 그가 새정부의 노동부 장관에 유임된 것을 가장 환영한 것도 노동계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수석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노동부 사람들은 그 만큼 부하직원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하는 장관은 없었다고 말한다. 부하직원이 일을 잘 못했을 때도 그는 질책과 함께 따뜻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웬만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그러나 일에 대한 그의 집념은 상상을 불허한다. 한마디로 철두철미하고 집요하다. 노동부장관 때 그는 부하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다시 썼다. 특히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수십번 고쳤다. 말그대로 토씨 하나까지 꼼꼼히 따졌다.지난해 8월 현대자동차 파업당시 그는 국민회의 중재단에 이어 울산에 내려갔었다. 사흘동안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재에 매달렸다. 결국 그는 국민회의 중재단도 포기한 노사협상을 타결시켰다. 3일간 그가 수면을 취한 시간은 고작 4시간. 그것도 사무실,복도 등에서 노루잠을 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작 노사가 합의안을 만들고 손을 맞잡을 때는 국민회의 중재단에 그 공을 돌렸다. 이수석의 이런 점 때문에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많다.이수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대통령과 이수석은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가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곁에 두고 싶어하는 김대통령의 뜻 때문이었다.그러나 이수석과 김대통령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고향이 같지만(이수석이 태어난 곳은 제주도지만 사실상 고향은 목포나 다름없다)김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지난해 1월 이 수석은 노동부 장관으로서 실업대책과 노사관계와 관련된 보고서를 김대통령에게 올렸다. 이때 이수석은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협의기구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때 김대통령은 핵심을 찌르는 안목과 간결하고 명료한 언변에 반했고 결국 그를 가장 아끼는 관료중의 하나로 꼽게 됐다.우연인지 현경제팀의 핵심멤버는 노동부 장·차관을 거쳤다. 진념 기획예산처장이 장관을,강봉균 재경부장관이 차관을 했었다. 그래서 노동부 국장급 인사는 『이번 경제팀은 과거보다는 노동자를 더 생각하는 경제정책을 펼 것』이라고 말했다.이수석이 이같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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