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로 'EMC신화' 이끈다

선진경영기법에 한국문화 접목 '승승장구' ... '최고 매니저상' 연속 수상

컴퓨터 저장장치분야의 세계적 기업인 미국EMC 한국법인인 한국EMC는 국내 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 하나를 갖고 있다. 법인설립이후 단 한명의 퇴사자도 없다는 점이다.지난 95년7월 설립 당시 이 회사의 직원수는 3명. 이후 매출이 급신장세를 보이면서 꾸준히 신규 직원을 채용, 현재 직원수는 56명으로 늘어났다. 4년 동안 이 정도 조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도에 『회사가 싫다』고 떠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매출이 해마다 늘면서 필요할 때마다 직원을 충원했을 뿐이다.사실 어느 기업을 막론하고 직원들이 이런 저런 사유로 그만두는 사례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회사가 직원들을 내보내는가 하면 직원들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EMC에서는 이것은 그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한국EMC 직원들은 무엇이 좋아서 한명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설립이후 퇴사자 한명도 없어그 해법은 이 회사 정형문사장(43)의 독특한 경영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경영관은 잭 웰치 등 세계 초일류회사를 이끌고 있는 경영자처럼 화려하지 않다. 컴퓨터 스토리지(저장장치)라는 첨단장비를 파는 경영인답지않게 촌스럽다. 「가족주의」라는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을 무기삼아 한국EMC의 성장신화를 일궈내고 있다.『직원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효와 가족을 강조합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가정보다는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회사분위기가 가정과 같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고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또 회사에 비즈니스 파트너가 왔을 때에도 내 집에 귀한 손님이 온 것처럼 맞도록 하고 있습니다.』사실 그의 가족주의 경영관은 외국계 기업에는 걸맞지 않는다. 성과를 바탕으로 연봉을 매기고 결과가 시원치 않은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자르는 것이 외국계 기업의 생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굳이 이것을 고집하고 있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선진국 기업이 마케팅 등 「경영하드웨어」는 뛰어날지 몰라도 조직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서다. 특히 외국계 기업의 경우 현지화 여부가 성패를 가름해 정사장은 다소 구시대적인 경영관을 채택했다.다른 외국계 기업의 잘못된 기업문화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정사장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의 경우 양쪽의 장점만 취합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면서 오히려 양쪽의 잘못된 기업문화만 접목돼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그는 직속상관의 손님이 와도 본체만체한다든지, 성과만 의식해 자기일이 아니면 도와주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외국계 기업의 잘못된 기업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이런 회사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선진경영기법에 가족주의라는 한국문화를 접목시켰다.그렇다고 정사장이 직원들의 잘못에 대해 못본체하고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직원들이 잘못할 경우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넘어간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수주실패 시뮬레이션」이 대표적인 예다. 수주에 실패할 경우 직원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상담에서부터 네고과정까지 6하원칙에 의해 어느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성공사례에서보다는 실패에서 배울 것이 더 많아서다. 물론 실패시뮬레이션을 할 때 그는 형이나 자상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한다. 가족주의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그는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돌아가기보다는 정면돌파를 자주 시도한다. 지난 95년 한국법인 사장 선임 당시 미국 본사와 벌인 담판이 좋은 예다. 당시 미국 임직원들은 한국에서 어떤 전략으로 영업을 할 계획인지를 물었다.그는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직접판매방식이 아닌 중간에 협력업체를 두고 간접판매를 하겠다고 말했다. 순간 미국 본사 임직원들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EMC는 직판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사장은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에서만큼은 간접판매방식으로 영업을 해야 성공한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사와 이견땐 승부사 기질 발휘한국법인 사장 선임은 물건너 갔다고 판단,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중 미국 본사는 사람을 급히 보내 선임장과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네줬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한국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직판 영업으로 한국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제안서였다. 회사원칙에는 어긋나지만 자신있게 영업방침을 밝힌 그를 한국법인 사장으로 선임한 것이다.지난해 IMF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판매협력업체에 미국 본사가 도움을 주기 위해 일정기간 고정환율을 적용해줄 용의가 있다는 의견에 반기를 든것도 그의 승부사 기질을 엿보게 한다. 그는 『이왕 도와줄 용의가 있다면 외상으로 장비를 팔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과감히 요구했다. 미국 본사가 반대한 것은 당연. 그러나 정사장은 굽히지 않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 방법으로 지난해 1천만달러어치의 스토리지를 판매했다. 외상매출금은 올들어 경기가 회복되면서 다 회수했다.탄탄한 팀워크와 정사장의 승부사적 영업전략이 힘을 발휘, 한국EMC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경쟁업체를 따돌리고 컴퓨터스토리지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가 하면 매출은 급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금년 상반기중 이미 지난해 매출액의 85%를 달성했고 이추세대로 가면 올 연말에는 지난해 매출액의 1백70% 달성은 무난하다고 정사장은 자신감을 보였다.이미 정사장의 경영능력은 미국 본사에서 검증을 받은 상태다. 미국 본사에서 수여하는 「최고 컨트리 매니저상」을 3년 연속 수상했고 그가 의견을 제시할 때면 본사 경영진들은 『헤이워드(Hayward, 정사장의 영문이름) 뜻대로 하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정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 또한 미국 본사와 다르지 않다. 정사장이 최근 자신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사심없이 평가해달라는 주문에 대해 한 직원은 그에게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일반적인 외국인 회사의 분위기가 삭막하고 이기주의가 팽배한 것과 달리 우리 회사는 서로를 한가족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경영방식이 있었기에 우리 회사가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직원의 평가에서 보듯 정사장은 미국의 경영기법에 한국의 경영문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EMC성공신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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