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의 땅' 개척하는 야심가

타워크레인 31대 보유, 건설현장 누벼 ... 최상위 중장비대여업체 '우뚝'

우진무역개발 고연호(36) 사장. 그는 무게가 1백t이나 나가는 타워크레인같은 중장비들을 건설업체에 대여하는 건설중장비대여업계의 거의 유일한 여성경영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전형적 386세대이다.이화여대 경제학과 82학번 출신인 그는 졸업 직후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졸업한 86년에 대졸여성을 공채하는 대기업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운동권출신을. 학점이 좋을 리 없어 대학원 진학도 생각할 수 없었다.『일본 돈을 벌어보자 생각했지요. 외국어학원을 석달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무역진흥공사에 가서 액자를 수입하겠다는 일본인 바이어의 리스트를 들고 왔습니다. 집 주소가 적힌 명함만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지요.』◆ 바이어 명함 한장들고 첫 출발무모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일본 바이어는 무엇을 보고 확신이 들었던지 아직 사업체도 없던 그에게 액자오더를 맡겼다. 그때가 87년. 오빠에게서 2천만원을 빌려 사무실과 공장을 얻고 사람을 뽑았다.사업은 초기에는 예상보다 잘 풀렸다. 일단 주문받으면 납기든 품질이든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다.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93년 탐색 끝에 건설중장비대여업에 진출했다. 대당 3억원씩 하는 타워크레인을 독일에서 들여와 그해 7월 대전우성아파트 건설현장에 처음 투입했다.그러나 같은 해 일본의 거품경제가 무너지면서 거래선이던 일본 바이어가 부도를 냈다. 매출규모와 비슷한 1백만달러 이상 손해를 봤다.95년에 사옥을 지을 때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옥건설 하청을 준 업체 사장이 공사대금을 다 받아 놓고는 부도내고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현장노동자들은 공사장에게 노임을 달라고 시위를 했다. 그들은 건물외벽에 「악덕기업주 물러나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건물출입을 통제했다. 대화도 거부했다.『학창시절 공단지역에 가투(가두시위)를 나가 노동자들과 함께 악덕기업주를 상대로 시위하던 생각도 나더군요. 기가 막혔지요.』 인내심을 갖고 대화의 장으로 끌어냈다. 공사대금도 정산해줬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이번에는 인부들을 직접 관리하면서 건물을 지었다.97년말 몰아닥친 IMF한파는 중소기업에는 더욱 가혹한 광풍이었다. 『1달러 8백50원이던 시점에 계약한 타워크레인이 부산항에 도착한 날 달러가 1천9백원이 됐습니다. 환차손의 위력을 뼛속까지 느꼈지요.』게다가 건설경기가 죽으면서 수주량은 격감했다. 업체간 경쟁은 더 치열해져 대여단가가 30∼40% 이상 떨어졌다. 더욱 어려운 것은 거래업체가 부도내는 것이었다. 『남의 돈을 끌어다 썼더라면 아마 망했겠지요. 거의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진무역개발은 지난해 약 7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올 봄에는 세무조사도 받았다. 『누군가 뒤에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젊은 여사장이 잘 나간다고 생각해서 의심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세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은 2, 3시간 장부를 들여다 보더니 『사장님, 우리가 잘못 찍은 것 같습니다』하고는 떠났다.우진무역개발은 건설중장비 대여업계에서 현재 최상위권업체로 꼽힌다. 대당 가격이 3억원부터 10억원에 달하는 타워크레인만 31대를 보유하고 있고 굵직굵직한 대형 공사현장마다 들어간다. 정부종합청사 신관, ASEM회의장, 영광원자력발전소같은 국책 건설현장과 아파트 건설현장에 이 회사의 타워크레인이 누비고 다닌다.고사장은 올들어 인접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대형건물에 나무내장재로 의장을 하는 건설목공업이다. 이미 두군데 수주도 받았다.남성문화가 지배적인 보수적인 건설업계에서 여성으로서, 그것도 개혁성향의 소유자로서 느낀 어려움은 없었을까.『항상 원칙대로 하고 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접대를 해야 통한다」고들 하지만 접대를 안해도 통하더군요. 상대도 내가 이미 기업을 10년 이상 경영했다는 점을 고려해서인지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보수적인 건설업계에서 내 생각과 나의 비즈니스 방식이 통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도 많이 변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하지만 고사장은 한국적 비즈니스 관행과 여건은 아직 개선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관공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문제는 인허가권을 가진 반관반민단체나 민간단체들. 이들은 자기가 소속된 업체와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다른 업체의 사업을 견제한다. 또 서류를 직접 들고가지 않고 팩스로 보내면 괘씸죄다.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휘둘러 중소기업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다. 기업도 공정경쟁의 룰에 익숙지않아 보인다. 「내가 수주하면 경쟁력이고 남이 수주하면 덤핑」으로 매도한다는 것.올 여름 고사장은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중국 건설시장의 진입 전략」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중국은 언젠가는 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에서 시장조사 삼아 공부를 했다. 무모한 도전처럼 시작된 사업이지만 야심찬 중소기업인으로 선 그의 모습에는 동년배에게서 보기 힘든 관록과 자신감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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