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필요없다”

사사건건 충돌 … 씨티은행 출신 리드회장, 구 트래블러스 그룹 회장에 밀려 퇴진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있는가? 자연의 법칙으로 말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아니오’이다. 하지만 기업의 세계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럴 수도 있다’가 정답이다. 최고 경영자(CEO) 직위를 쌍두마차 체제로 운영하는 회사가 한 둘이 아니다. 몇 년전부터 불어닥친 주요 기업간 합병(M&A) 바람으로 이런 추세는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M&A를 거쳐 한데 합친 회사들이 ‘조직 융화’를 위해 합병 이전 양사의 총수들에게 ‘공동 CEO’ 자리를 만들어준 결과다. 씨티은행과 트래블러스그룹이 합쳐진 씨티그룹, 독일의 다임러 벤츠사와 미국의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결합해 출범한 다임러 크라이슬러사, 미국 석유업계의 양대 라이벌이 뭉친 엑슨 모빌사 등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이들 기업은 외견상 큰 무리가 없이 공동 CEO들간의 협업체제를 이끌어 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비추어져 왔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기업의 세계에서도 예외일 수 없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한 지붕 아래 두명의 가부장이 언제까지고 양립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실증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씨티그룹에서 일어난 공동 CEO간의 불협화음과 그에 따른 단일 총수체제로의 전환은 이같은 명제를 극적으로 뒷받침해준다.지난 2월 하순, 전씨티은행 회장이자 씨티그룹의 공동 CEO를 맡고 있던 존 리드 회장은 전격 퇴진을 발표하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그리고는 지난 18일 조용히 씨티그룹을 떠났다. 지난 98년4월 전격 출범한 씨티그룹은 이로써 트래블러스 그룹 출신의 샌포드 와일 회장에 의한 단일 CEO체제로 바뀌었다. 리드 회장은 올해로 61세. 와일 회장(67세)과의 나이차로 보나, 60대 CEO가 즐비한 월가 경영자들의 연령 구조로 보나 그의 일선 은퇴는 중도 낙마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씨티그룹 최고 권부의 구중궁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결론부터 말하면 두 월가 스타간의 전격적인 결별은 ‘성격 차이’가 원인이었다. 무엇이든 꼼꼼하게 따지고 앞뒤를 분석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리드 회장과 직관을 믿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의 와일 회장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리드 회장이 퉁겨져 나왔을까? ‘세력’에서 와일 회장에게 크게 밀렸기 때문이다. 리드 회장의 퇴진에 결정타를 가한 한 사건이 이를 입증한다.무대는 씨티그룹판 ‘대권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지난 2월 하순의 임시 이사회 회의실. 중요한 경영의사 결정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던 두 공동 CEO 간의 분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먼저 공격의 칼을 빼든 쪽은 리드 회장이었다. 그는 “후계자를 물색한 뒤 나와 와일 회장이 동시에 물러나도록 하자”며 ‘동반 자살 카드’를 꺼냈다. 배수진을 친 선제 공격이었다. 그러나 와일 회장은 “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한마디만 내놓고는 팔짱을 꼈다. 무려 8시간에 걸쳐 참석자들 간에 난상토론이 벌어졌지만 결론은 쉽게 도출되지 못했다. 이사회 멤버들은 마침 얼마전 경영위원회 의장으로 영입된 로버트 루빈 전재무장관에게 의견을 구했다. 루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일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임자가 나올때까지는 와일 회장이 남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일격을 당한 리드 회장은 원군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립무원을 확인한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씨티은행과 트래블러스 그룹이 합병 절차를 마무리한 98년10월 이후 1년 5개월여 동안 지속됐던 ‘양웅(兩雄) 동거체제’는 이렇게 해서 막을 내리게 됐다.그렇다면 리드 회장은 왜 세력에서 밀렸을까? 씨티그룹 지분의 다수를 쥐고 있는 구 트래블러스 그룹 출신 이사들 쪽에서 보면 씨티은행 출신의 그는 ‘업혀온 자식’이었다. 양사 합병의 주체는 트래블러스 그룹이었고, 씨티은행은 흡수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와일과 리드 두 공동 회장간 힘의 저울추는 처음부터 와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셈이다.두 공동 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룹의 핵심적인 전략 프로젝트를 놓고도 이견이 노출되고, 갈등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먼저 관계 복원을 시도한 쪽은 리드 회장이었다. 그는 와일 회장에게 마찰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예 각자의 업무 관장 분야를 명확하게 구분할 것을 제의했다. 리드 회장은 그룹의 인터넷 및 기술 문제를 전담하고, 와일 회장은 투자 금융 및 영업 등 그룹 운영 분야를 맡는 것으로 교통 정리가 이뤄졌다.◆ 임직원들도 “두 상전 모시기 힘들다” 불만와일 회장은 이 즈음부터 ‘리드 내몰기’의 정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리드 회장파로 분류되는 구 씨티은행 출신들을 포함해 주요 임원들을 ‘내 사람’으로 포섭하는 공작에 소리없이 착수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리드 회장의 오른팔로 통했던 빅터 메네제스 글로벌 금융담당 사장을 자기 사람으로 바꿔 놓는데 성공한다.이후 두 공동 회장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농담을 뚝 끊었다. 공공석상에서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기 싸움’까지 다반사로 벌였다.이처럼 두 공동 회장이 서로 삐걱거리자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두 상전을 모시고 일하기가 어렵다”는 볼멘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러던 차에 리드 회장의 운명을 재촉하는 일이 지난 1월 벌어졌다. 씨티그룹의 글로벌 소비자 비즈니스 부문을 책임지고 있던 로버트 리프 사장이 “사사건건 간섭을 해대는 리드 회장 때문에 일을 못해먹겠다”며 사의를 밝힌 것이다. 와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리드의 독선 때문에 유능한 경영자를 잃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드 회장의 목을 조이는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난 2월 아리조나주에서 열린 그룹 고위 경영간부 연찬회에서 ‘씨티그룹,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자유 토론 순서가 마련되자, 상당수 참석자들이 공동 CEO체제의 문제점을 들고 나섰다. 연찬회에 참석했던 두 회장은 “조만간 대책을 내놓겠다”고 공개 약속했다. 그리고 소집한 것이 2월 하순에 열렸던 문제의 임시 이사회였다. 이 자리에서 리드 회장은 등을 떼밀리다시피 쫓겨나오는 것으로 결말이 나고도, 계속해서 수모를 당해야 했다. 와일 회장은 그가 정식 퇴임하기도 전에 새로운 인터넷 운영 위윈회의 구성을 발표하는 등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드가 관장하고 있던 사업 부문을 재빨리 접수했다. 4월 초 씨티그룹 본점 대회의실에서 리드 회장의 퇴임을 위로하는 리셉션이 열렸을 때도 브라질 출장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반면 지난 3월 와일 회장이 67회 생일을 맞았을 당시, 그의 자축 파티는 의미심장하게 진행됐다. 그룹 고위 간부들을 초청한 가운데 연 파티에서 와일 회장은 구약시절 유태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당시 ‘엑소더스’를 지휘했던 모세를 자임, 흰 수염과 당시의 의상 등으로 분장하며 생일을 즐겼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얘기는 더욱 가관이다.한 고위 경영 간부는 “지난 2년간 우리 그룹은 길을 잃고 사막에서 헤매었다. 그런 우리를 당신이 구해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게 됐다”며 간지러운 얘기를 늘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말 끝에 그 간부는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정작 모세 자신은 그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이 말에 와일은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고 한다. 2월 하순의 임시 이사회에서 와일의 유임 조건으로 “2년내에 후계자를 정한다”는 다짐이 있었지만, 와일 회장은 당시 측근들에게 “그렇게 일찍 물러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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