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섬업체 수출파트에서 근무하는 김진강씨(30)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앞 병원을 찾았다. 어젯밤 바이어들과 마신 술 탓인지 한동안 잠잠하던 두통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처방전을 받아들고 간 인근 약국에서 건네준 약은 전에 먹던 그 약이 아니었다.“이건 처음 보는 약인데요. 전에 먹던 게 잘 듣던데.”“이게 더 좋은 약이에요. 오리지날이니까.”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의약분업 후 국내제약업계엔 ‘오리지날’과 ‘카피제품’의 무한 경쟁이 가속화되기 시작됐다. 이른바 ‘생물학적 동등성(Bioequivalence)’이란 약효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내 제약업체들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6백여종의 ‘제네릭’ 약품들은 퇴출 위기를 맞게 됐다.소비 줄어 시장규모 5조원대 전망국내 제약시장은 벌써부터 신약과 오리지날 의약품으로 무장한 다국적 제약기업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신종욱씨는 “요즘 외국산 약이 적힌 처방전이 부쩍 늘었다”며 “이 때문에 예상 수요를 감안해 다국적 기업 제품을 미리 확보해두고 있다”고 말했다.80년대 후반 이후 선진국 제약사들이 신물질특허기술의 이전을 기피함에 따라 그동안 국내제약사들의 ‘제네릭’ 의약품 생산기능은 위협을 받아왔다. 파죽지세로 국내에 진출한 이들 외국기업들은 기존의 기술이전 대신 직격마케팅으로 시장장악에 나섰다. 90년대 중반 이후 자본시장 개방도 외자기업과 다국적기업들의 무한질주를 계속 부추겨왔다. 앞으로 의약분업이 본격화되면 현재 15% 이상인 외자기업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계속 수직상승할 전망이다.이와 함께 약물오남용이 줄어 의약품 소비도 전체적으로 감소할 조짐이다. 올해 국내 의약품 시장규모가 기껏해야 5조원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제약업계에선 내다본다.여기에 약효동등성 인정기준이 비교용출에서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으로 바뀌면 오리지널 의약품 사용은 더욱 늘게 된다.이렇게 되면 품질이나 기술보다는 덤핑 등 가격 경쟁으로 단순 복사의약품을 생산해온 상당수의 국내 제약사들은 외자기업의 내수시장 잠식으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치열한 21세기 무역환경 속에서 전세계는 하나로 통합되고 국내 제약산업도 막강한 선진 제약기업들과 무한경쟁을 해야만 하는 완전개방체제에 놓인 것이다. 한국 제약산업은 21세기 생존 및 발전전략을 다시 세워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생산실적 상위 10대 제약사의 시장점유율이 27.6%로 세계 상위 10대 제약기업의 시장점유율 45.5%에 비하면 집중도지수가 낮다. 이는 국내에 세계적 수준의 제약기업이 없다는 것과 신물질·신약의 개발능력이나 기술수준이 중·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반영한다.이때문에 독자 브랜드 제품을 가지고 있거나 신약개발 과정에 진입해 있는 대규모 제약기업들도 외자제약기업과의 한판승부가 점쳐진다. 결국 전체 6백10개의 국내 제약사중 몇 개나 살아남을 지도 미지수다. 아예 다국적기업에 흡수합병될 수도 있다.이처럼 초유의 위기를 맞은 우리 제약산업의 돌파구는 결국 ‘신약개발’밖에 없다. 최근 미국과 영국 등 6개국 국제컨소시엄인 ‘인간게놈프로젝트(HGP)’ 등에서 유전정보의 총체인 인간게놈 지도가 완성됐음을 공식 발표했다. 이 게놈 지도가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규명과 치료제 개발 등을 밝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다.신약개발만이 시장 수호 방패이에 힘입어 선진국 제약사와 생명공학기업들이 ‘신약전쟁’ 참전을 선포했다. 국내에서도 올들어 제약사들의 신약개발 노력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다만 내수부진, 의약분업 향방 등 난관들을 뚫고 어떻게 신약전선에 뛰어들지가 관건이다.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 제약사들이하나둘씩 신약개발에서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웅제약의 당뇨성족부궤양치료제를 비롯해 동화약품의 간암치료제와 동아제약의 위점막보호제, 그리고 중외제약의 퀴놀론계항생제 등이 신약으로 상품화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에도 4건의 신약이 출시돼 신약개발 성과가 더욱 구체화될 전망이다. 대기업과 바이오벤처들도 신약개발의 첨병으로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다국적기업의 총공세에 맞서 국내업체들이 시장수호와 신약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지가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