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시장서 흥행, 상업성 입증… 리스크 커 영화화 지속은 불투명
영상무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첨병, 한순간의 판단 착오가 어제의 가문의 영광을 오늘의 멸문지화로 만드는 곳. 사파무공과 정파무공, 선과 악의 구분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돌변하는 곳. 영상무림에 무협의 열풍이 그칠 줄 모르고 불어온다.콘텐츠로서의 무협의 상품적 가능성에 일찍 눈을 뜬 곳이 영화계다. 끊임없이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재와 장르를 찾아 헤매는 제작자들의 무협물에 대한 관심이 이후 한국영화 제작비의 대형화와 맞물린 시점에서 무협영화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투자비 대형화 맞물려 제작 붐비천무때마침 세계 영화계에서도 무협 바람이 거세다. 대만 출신의 리안 감독이 다국적 자본을 동원해 만든 영화 이 보유한 기록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영국판 아카데미상인 오렌지 브리티시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미국영화협회 AFI가 선정한 2000년 10대 영화에 선정됐고 LA비평가 협회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촬영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2000년 최고의 영화로도 뽑혔다. 아카데미에는 최우수작품, 감독, 외국어 영화상 등 10개 부문의 후보로 올라 있다. 평단의 반응만 좋은 것이 아니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1억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 가 보유하고 있던 외국어영화의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이 영화는 강호의 고수인 리무바이와 약동하는 젊음을 어쩔 줄 모르는 용, 그들의 연인인 수련과 호, 네 사람의 이야기를 청명검이라는 보검을 매개로 풀어낸다. 중력 따위는 무시하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고수들의 화려한 무술이 춤추듯 우아하게 펼쳐지고 중국 대륙의 풍광이 화면을 수놓는다. 매혹적인 액션 뿐 아니라 촘촘하게 짜인 농밀한 드라마로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점이 서구 언론에 크게 부각됐다.리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규율로 단련된 사나이가 긴장을 풀고 자아를 해방시킬 때 비로소 순수한 파워와 업적에 집중해 우주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알다시피 본래 동양적 전통이다. 서구의 감독은 동양의 감독을 수십년간 카피해 왔는데 가 나온 다음에는 어쨌든 우리가 그 영화가 세운 기준을 능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어찌됐든 원조집이니까 반드시 이겨야 되는 거다” 라고 밝힌 바 있다. 감독의 이같은 발언은 무협이 서구 시장에 내다 팔기 좋은 장르임을 입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싸이더스의 조민환 이사 역시 무협영화의 호소력을 조지 루카스의 메가히트 상품 에 견주어 설명했다. “각 나라마다 역사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신화 활극이 있다. 는 짧은 역사로 인해 일종의 열등감을 지닌 미국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변형된 미국판 무협 신화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무협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국내에서는 등의 영화가 잇따라 제작돼 무협 붐을 예고한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를 제외하고 이 작품들은 모두 제작비 규모가 크고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지만 관객 동원에는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국내 영화계 무협물의 효시격인 작품은 96년 개봉한 다. 20만명의 관객이 든 이 영화가 무협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면 지난해 여름 최고의 블록버스터 는 한국영화의 제작비 대형화와 무협의 결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혜린의 베스트셀러 만화 원작, 스타 시스템, 홍콩 무술팀의 와이어 액션, 4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 마케팅 대공세, 전국 1백20개 극장에서 이 영화를 개봉한 메이저 배급사 시네마 서비스의 배급능력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형이 됐다. 의 김영준 감독은 “20년간 단절돼온 장르를 개척하는 실험을 해 본 것,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 잠재되어 있던 무협의 소비층을 끌어낸 것 등에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김감독에 따르면 IMF 경제위기 전후에 기획된 무협영화가 다수 있었다고 한다. 멜로 등 한정된 장르에 식상한 제작자들이 무협을 대안으로 생각했고, 30∼40대가 주류인 제작자들이 무협영화에 향수를 갖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돈이 많이 드는 장르라 리스크가 커 상당수의 기획이 영화화되지 못하고 사라졌다.멜로 장르 식상, 무협 붐 기폭제 역할 이후 다시 한 번 국내 영화 최대 제작비 기록을 경신한 는 또하나의 실험이다. 고려 무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등으로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과시한 김성수 감독과 화려한 캐스팅, 1백% 중국 촬영과 의 미술 스태프들의 참여 등으로 풍부한 볼거리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많은 사람들이 무협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 특별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는 홍콩 와이어 액션 무술팀의 힘을 빌려 액션 장면을 찍었고 역시 중국 인력을 빌린 합작 프로젝트다. 더욱이 싸이더스 조이사는 “이제 국내에는 사극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 현지에서 제작할 경우 제작비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고 한국 무협만의 개성을 살리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가능성이 풍부한 매력적인 상품, 무협영화는 그만큼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계의 무협 바람은 지속될 수 있을까.“결국은 상상력과 소재의 문제다. 자본과 무협의 결합이 좋지 못한 결과를 낳으면 이 장르가 도태될 수도, 또 어디선가 새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도가 계속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고 조이사는 말한다.인터뷰 - 프로듀서 조민환 싸이더스 이사“대중은 판타지를 원한다”조민환 프로듀서는 연일 강행군중이다. 5년 전부터 기획됐다는 영화 를 위해 지난해 12월 말까지 중국에서 촬영을 마쳤고 지금은 편집 등 후반 작업이 한창이다. ‘역사 무협 전쟁물’ 는 순제작비 52억원 등 마케팅 비용까지 합해 총 70여억원을 쏟아부은 초대형 프로젝트.무협 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적어도 영화에 있어 무협 붐을 하나의 현상으로까지 여기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등이 줄줄이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워낙 다른 기획에서 나온 작품들이고 기획 시점도 각각 다르다. 의 경우 무려 5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김성수 감독과 내가 ‘무협’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한번 해 보자’고 얘기가 돼 감독이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가 고려 문헌을 뒤지다가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은 있으나 돌아왔다는 얘기가 없는 무사들에 관한 기록 한 줄을 발견했다. 거기서부터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얘기가 됐다.직설적으로 무협이란 돈이 되는 콘텐츠인가.‘대중은 판타지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같다. 각 나라마다 역사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신화 활극이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제작자들의 판단에 따라 어느 시기에 얼마만한 규모로 영화화되는가인데 최근 1, 2년간 집중되어 나타난 경향이 있다. 이들이 대중은 판타지를 기대한다는 해석 아래 볼거리가 많은 비사실적 활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기대 또는 발견하고 제작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분석이다. 이것이 가능해진데는 대형화하는 한국 영화의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 기본적으로 액션과 사극이 결합되면 볼거리가 많아지는 대신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의상, 소품, 세트 등을 하나 하나 다 만들어야 하고 특수효과와 스턴트에도 크게 기대야 되니까. 비용 부담이 큰 만큼 리스크가 큰 장르다. 그래서 전에는 하고 싶어도 못했다. 하지만 가 한국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준 후 제작비 규모가 커지면서 이런 기획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화의 소재와 상상력의 고갈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영화의 소재가 현대를 다루기엔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니 사극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건 당연한데 여기다 스펙터클과 관객이 좋아할 액션도 넣어야 한다. 이런 요건을 갖춘 것 중 하나가 무협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인 디아블로 같은 게임이 나와서 인기를 얻는 걸 보면 게임 산업도 역시 영화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규모가 큰 만큼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나.물론 한국영화가 제일 비싸게 팔리고 있는 일본시장이 가장 크고 중국 홍콩 등의 중국어권을 포함한 극동아시아지역이 주요 타깃이다. 영화 대사 중 3분의 1이 중국이고 중국 출신의 배우 장지이를 캐스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운 좋게도 최근 그가 주연한 이 세계적으로 화제작이 되면서 이 배우의 인기가 급상승해 우리 영화의 흥행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는 아무래도 한국영화가 약세인데 이 서구에서 크게 성공함에 따라 의 유럽시장에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미라맥스 등 미국의 메이저 배급사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고 해외 배급을 맡고 있는 CJ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여러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잘 될 것 같다.하지만 은 미국과 유럽에서는 크게 흥행했지만 정작 중국과 홍콩,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나.의 리안 감독보다 의 김성수 감독이 동양적인 정서를 잘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대만에서 자랐지만 서구에서 교육받은 리안은 동양과 서양 정서의 혼합에는 능하지만 온전히 중국 정서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중국 언론도 이런 점에서 그의 영화를 혹평했고 이같은 혹평이 흥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 관객은 의외로 사실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너무 황당한 장면은 배제하기로 했다. 우리 영화는 하늘을 날지도 않고 온갖 황당한 신기를 선보이지도 않는다. 사실적인 액션이라는 면에서 무협영화의 정통에서 살짝 비껴 있으나 무협의 정서적 핵심인 ‘협’과 ‘의’를 부각시켰다. 이런 점이 우리나라와 중국어권 관객에게 호소력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무협영화 계보무협영화 대부는 호금전·장철무협영화의 대부 2인은 호금전과 장철이다. 호금전은 대륙기질이 드러나는 무협영화로 유명하다. 등 ‘객잔 4부작’과 등의 ‘풍경 4부작’은 호금전의 무협영화를 대표한다. 동시대 ‘외팔이 시리즈’의 장철은 다르다. 왕우, 강대위, 적룡 등을 내세워 무술로 단련된 남성영웅을 중심에 두고 복수와 의리가 변함없는 영화의 주제로 처참하게 망가지는 영웅들의 비장미를 강조했다.1983년 서극의 이 나왔을 때 홍콩 무협영화는 기로에 서 있었다. 60∼70년대 호금전과 장철로 대변되는 무협영화의 두 갈래 흐름이 무협영화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이소룡과 성룡으로 이어지는 쿵푸영화에 자리를 내 준 상황. 서극은 에서 무협을 SF판타지로 바꿨다. 이때부터 1997년의 흥행작 에 이르기까지 서극 방식이 무협영화의 주류를 이룬다. 90년대 들어서는 등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 무협물은 또한번 좋은 시절을 맞는다. 정통 무협에 코미디, 멜로, 뮤직비디오 기법 등 다양한 장르가 더해지고 ‘테크노 무협’도 나왔다.무협의 대부 장철의 미학은 오우삼의 홍콩 느와르로 이어졌으나 호금전의 미학은 적당한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서극 등의 무협영화에서 그의 색채가 보이지만 기교에 한정되고 정서는 다르다. 싸구려 취급을 받으면서도 중국문화에서 가장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장르는 이제 자기 복제를 거듭하다 시장에서 버림받는 처지로 전락한다. 쇠퇴해가는 이 장르를 비웃듯 나타난 은 정서적이나 지역적 정체성에서 독특한 존재다. 형식적으로는 호금전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무협의 상투적인 권선징악과는 별 관계가 없이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탐구하는 무협 장르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