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정주영=5백원 지폐 담판정전명예회장의 경영스타일은 ‘불도저’다. 수많은 미사여구를 빌릴 필요 없이 이 말 속에 세계 초일류 CEO 정주영 전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여기엔 일단 시작한 사업이면 아무리 힘들지라도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전명예회장의 고집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러나 정전명예회장의 고집은 오늘의 한국경제를 있게 한 원천이었다.불도저경영의 하이라이트는 한국경제의 주춧돌이 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자동차는 한나라의 경제지표가 될 만큼 경제적 중요도가 높은 산업이다. 정전명예회장은 70년대 초반 포드와 합작으로 자동차사업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사사건건 포드가 문제를 삼고 나중엔 현대자동차를 통째로 삼키려는 속셈을 드러내자 정전명예회장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그리고 자동차 기술이 거의 전무한 최악의 상황에서 동생 정세영 현대자동차사장(현 현대산업개발명예회장)에게 1백% 국산자동차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자노선 선언 3년만인 76년 국내 고유모델 1호 ‘포니’ 승용차를 탄생시켰다. 정전명예회장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포니도 안나오고 지금의 현대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정주영 전현대명예회장의 별세를 애도하는 남과 북의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3월23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세계 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 창업에도 그의 불도저 경영은 유감없이 빛을 발휘했다. 정전명예회장은 영국은행이 중공업 창업에 의구심을 나타내자 그 자리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보이며 “우리는 영국보다 3백년 앞선 1500년에 이런 철갑선을 만든 나라”라며 호소했다. 이런 담판 끝에 영국은행으로부터 선주를 구해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을 얻어낸 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를 선주로 잡아 유조선 2척의 주문을 받아냈다. 결국 정전명예회장은 외국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성공, 세계 최대 조선소를 최단 시일에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 오늘의 현대중공업을 일궈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CEO가 바로 정전명예회장이다.아이디어맨 정주영=폐유조선공법정전명예회장은 일단 일에 발을 들여놓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일을 시작한 뒤에는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북한 강종훈 아태평화위원회 서기장은 3월22일 금강산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전을 보낸데 이어 조문단을 서울에 파견, 정명예회장의 죽음을 애도 했다.‘정주영 공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84년2월 서산A지구 최종 물막이 공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총연장 6천4백m의 방조제 공사에 최후로 남았던 2백70m 길이의 물막이가 난제로 떠올랐다. 실무자들도 해결책을 못찾고 안절부절할 때 정전명예회장은 느닷없이 폐유조선을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고철로 쓰려고 30억원을 주고 사 울산에 정박시켜 놓은 폐유조선 워터 베이 호를 끌어오라고 한 것이다. 이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거센 물줄기를 막은 뒤 바위 덩어리들을 투하, 성공시켰다.이 유조선 공법은 외국 유력언론들이 대대적으로 소개해 영국 런던 템즈 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세계적인 철 구조물 회사가 현대에 이 공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다.서울올림픽 유치는 정전명예회장의 꽃바구니 아이디어가 사실상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전명예회장은 ‘기뻐하는 아내를 보면 남편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데 착상, 각국 IOC위원 부부방에 비싼 장미로 만들어진 꽃바구니를, 그것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기 전날까지 계속 싱싱한 것으로 교체해 보냈다. 정전명예회장의 생각대로 IOC위원들은 감탄해 많은 감사인사를 받아 IOC위원들에게 최고급 일제 손목시계를 보낸 일본 나고야시를 보기 좋게 따돌렸다.정전명예회장은 한국전쟁 중에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를 푸르게 가꿔 달라’는 미군의 요청에 따라 보리밭을 떠다가 묘에 입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현대건설이 미군공사를 독점, 건설신화를 창조했다.이벤티스트 정주영=소떼방북정전명예회장의 소때방북은 곧바로 금강산 개발사업으로 이어져 남북 화합의 큰 물꼬를 텄다.“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세 번째 가출을 할 때 아버님이 소 판 돈 70원을 갖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후 긴 세월동안 저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그 한 마리 소가 1천마리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정전명예회장은 98년6월 소 5백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북으로 가면서 벅찬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전명예회장은 89년 베이징을 통해 평양에 들어가면서 “이번만큼은 판문점을 거쳐 방북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했고 방안을 모색하던 중 아무도 착상하지 못한 소떼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한다. 정전명예회장은 93년 서산농장에 소 1백50여마리를 사 방목한 뒤 매일 새끼를 몇마리 낳았는지, 소 몇마리가 아픈지 등에 대한 보고를 들어왔었다는 것.정전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곧바로 금강산개발사업으로 이어져 남북관계를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전명예회장의 이같은 노력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등 남북화합에 큰 성과를 낳았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80년대 초반 무역전시장에 전시된 '포니II'정치가 정주영=대권 도전정전명예회장은 도중에 사업을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해 일을 꼭 이뤄냈다. 하지만 정회장에게도 더 이상 재도전을 못하고 좌절을 맛봐야 하는 쓰라린 경험이 몇차례 있었다.92년 정전명예회장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했다. 이로 인해 정전명예회장과 가족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그룹은 세무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특히 정전명예회장은 93년 서울지검에 불려가 대통령선거법 위반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전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혹자는 대통령 출마의 낙선을 두고 내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였다고 말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며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YS의 실패이다”고 끝내 그의 ‘실패’를 부인했다.정전명예회장의 두 번째 시련은 아무래도 뉴밀레니엄에 접어들어 벌어진 아들간의 경영권 다툼일 것이다. 가뜩이나 IMF 한파로 현대가 어려운 지경에 몰려있는 가운데 터진 아들 정몽구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간 경영권 분쟁은 정전명예회장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혔다. 정전명예회장은 노구의 몸이라 아들들의 중간에 서서 불도저같은 힘을 내세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때문에 정전명예회장의 아들 두 형제는 정몽구회장의 그룹 분가로 끝을 맺었다.이같은 아들들의 다툼으로 그룹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어 정전명예회장이 아꼈던 현대그룹의 모태 현대건설이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어쩌면 정전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위기를 무엇보다 안타깝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정전명예회장은 늘 측근들에게 “많은 업종의 회사를 세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건설업을 하는 ‘건설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잃어본 적이 없다”고 자랑했었다.인간 정주영 = 부모 그리는 효자78년 강릉 하계수련회에서 흥에 겨워 직원들과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고 있다.정전명예회장은 갑부였지만 일반인들보다 더 검소하게 지냈다. 현대는 최근 정전명예회장이 사용하던 서울 청운동 자택의 방을 공개했다. 정전명예회장의 방에는 침대와 마사지 등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간이침대, TV, 책장, 책상, 그리고 호흡기가 좋지 않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들여놓은 가습기 2대와 온·냉풍기 2대가 전부였다. TV는 29인치로 꽤 컸지만 상표는 LG전자의 옛 상표인 `골드스타(Goldstar)’였고 책장과 그 옆으로 놓인 사이드 책장도 모서리가 닳아 수십년 된 물건이었다. 정전명예회장은 ‘더워봤자 두주일인데 참는게 낫지’라며 한동안 에어컨, 선풍기, 부채 등을 집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정전명예회장은 구두는 7년, 울산의 작업화는 15년동안 신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 주위사람들이 “새 신발을 사지 않느냐”고 물을 때마다 정전명예회장은 “버선하고 마누라는 오래된 게 편하다는 말이 있다”는 얘기로 가볍게 넘겼다고 한다.정전명예회장은 커피보다 대추나 생강차를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커피는 외국에서 돈주고 사오는 것이잖아요. 일본사람들도 절약하겠다고 녹차 마시는데 우린 구식사람이라 그런지 대추 생강이 좋다’. 정전명예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진출했을 당시 한동안 사막을 차로 달릴 때 카세트 테이프 수십개를 갖고 다니면서 노래를 배웠다. 가사는 외웠지만 곡이 따르질 않아서다. 정전명예회장은 노래를 열심히 배운 이유에 대해 “판을 벌려놓고 노래하라고 할 때 안하면 그 판이 깨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측근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정전명예회장은 소년시절 소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되려면 사범학교를 나와야 하기에 가난한 농부의 자식인 정전명예회장은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고 정전명예회장은 법학을 공부해 소설 의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보통고시에 떨어져 이도 포기했다. 하지만 정전명예회장은 이때 독학으로 배운 법률지식으로 특별한 법률고문 없이 외국에 나가 계약을 체결할 정도였다고 한다.정전명예회장은 한 강연회에서 부모를 몹시 그리는 마음을 털어놓았다.“나는 언제나 부모님과 고향산천을 거니는 꿈을 꾼다. 내 젊음을 포용하기엔 너무도 좁고 가난하기만 하던 강원도 통천의 내 고향. 천당이나 극락세계가 따로 있을까. 부모님의 영혼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정전명예회장은 그 에덴 동산으로 돌아갔다.■ 1915.11.25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 출생(정봉식-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 1930.3 송전소학교 졸업■ 1938.1 경일상회 설립■ 1939.1.8 변중석 여사와 결혼■ 1940.3 합자회사 아도써비스 공장 설립■ 1946.4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5.25 현대토건사 설립■ 1950.1.10 현대자동차·현대토건사 합병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 대표이사 취임■ 1950.3 현대상운주식회사 설립■ 1960 현대건설,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 한도액 1위■ 1960.12 현대자동차(주) 설립■ 1969.1 현대건설 회장 취임■ 1969.12 현대시멘트 설립■ 1970.7 경부고속도로 건설공로로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 1971.2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1.6 금강개발 설립■ 1973.12 현대조선 설립■ 1974.2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자동차서비스 설립■ 1975.4 현대미포조선 설립■ 1976.3 고려산업개발 설립■ 1976.12 현대종합상사 설립■ 1977.2 울산공대 이사장■ 1977.7~87.2 전경련 13~17대 회장■ 1977.7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설립, 이사장 취임. 현대정공 설립■ 1981.3 ‘88서울올림픽유치위원장■ 1983.2 현대전자산업 설립■ 1984.2.25 서산물막이 공사(유조선공법 또는 정주영공법 시도, 성공)■ 1986.11 현대산업개발 설립■ 1987.2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전경련 명예회장 취임■ 1988.2 서울올림픽 유치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89.1.23 남한 기업인 최초로 북한 방문, 금강산합작개발 의향서■ 1991.10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출판■ 1992.1 통일국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1992.3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당선, 통일국민당 31석 획득■ 1992.12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낙선(16.3%득표)■ 1993.2 통일국민당 탈당, 국회의원직 사퇴■ 1993.5 대통령선거법 위반 공판 시작■ 1994.5.3 경영일선 완전 은퇴 선언■ 1994.7 서울고법 , 대통령선거법 위반 공판항소심판결 징역3년 집행유예 4년■ 1995.8 서산농장 완공(1980.5 사업착수)■ 1996.10 타임지(誌),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 선정■ 1998.6.16 판문점 거쳐 소떼몰이(5백마리) 방북■ 1998.6.23 금강산개발·관광사업 합의■ 1998.10.27 2차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최초 접견(10.30)■ 1998.11.18 금강산 관광선(금강호) 첫 출항■ 1999.2.5 현대아산 설립■ 2000.3.14 5남 정몽헌 회장을 새 현대그룹 회장으로 지명■ 2000.5.31 정몽구·정몽헌 회장 등과 3부자 동반퇴진 발표■ 2000.6.29 방북, 원산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2차 면담■ 2000.12 현대건설에 사재 2천6백억원 출자 최대주주 복귀(16.3%)■ 2001.3.21 노환으로 별세. 향년 8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