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시장 ‘패션 밸리’로 뜰까

동대문시장의 오늘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7∼8시. 동대문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이제 막 학교를 파한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가방을 멘 채 밀리오레, 두타, 프레야타운 등 대형 신식 쇼핑몰을 기웃거린다. 소매가 위주인 이들 상가는 물론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긴 하지만 주타깃 층인 10대 학생들, 즉 N세대들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저녁시간대가 본격적인 영업시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대문은 10대들의 또다른 ‘해방구’로 표현되기도 한다.10대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요란한 쇼도 이 시간이 돼야 절정에 달한다.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대다수가 일본인과 중국인들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4월말∼5월초가 황금연휴 기간이라 상가들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념이 없다.다시 발길을 돌려 동대문 운동장 쪽으로 가보자. 아트프라자, 디자이너클럽, 혜양엘리시움 등이 몰려 있는 이곳 도매상가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가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이 소란스러움은 예기치 않은 한산함으로 바뀐다. 고객을 끌기 위해 음악은 크게 틀어 놨지만 실제 상가 안에서 거래하는 고객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혜양엘리시움 등 일부 상가는 도매상가가 한참 붐빌 시간인데도 여전히 잠겨 있거나 아예 비어있는 곳도 상당수 눈에 띈다. 예전 같으면 밤 10시가 지나기가 무섭게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버스들로 가득차던 상가 주변 도로도 비교적 한산하다. 이들 도매상가에 붙어 있는 동대문운동장 공용 주차장의 상당 부분도 자리가 텅텅 비어 있는 실정이다.동대문시장의 이런 모습은 바로 ‘동대문이 한물갔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겉으로 보기에 동대문은 예전에 비해 훨씬 화려하고 번잡해졌다. 서부상권에 밀리오레 두타 등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 이름은 많이 알려졌지만 ‘큰 돈’이 오가던 도매시장 기능이 위축되면서 실속은 없어졌다는 것이다.동대문시장의 미래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동대문 시장의 본래기능인 도매상권이 죽으면 동대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자연히 동대문의 최대 장점인 가격경쟁력과 순발력도 빛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미 전통적인 도매상가들이 문을 닫거나 소매 부문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이런 조짐은 단순한 예측이 아닌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현재 동대문시장 전체의 한해 매출은 연 35조∼40조원 수준, 수출물량도 줄잡아 10조원은 된다는 것이 시장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이들 수치는 ‘자료’가 전무한 동대문의 실정에 미뤄 공식 집계라기보다 상인들이 알음알음으로 공개하는 점포별 평균 매출을 토대로 추산한 수치다. 다만 이들 매출액 및 수출규모는 최근 들어 적게는 20∼30%, 많게는 절반 넘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 때 동대문시장의 수출규모는 국내 자동차 수출규모에 맞먹는 19조∼20조원에 달했던 것으로도 추산됐다.그렇지만 중요한 점은 현재의 규모만으로도 동대문시장은 국내 의류산업의 집적지이자 수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장을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탈바꿈시킬 경우 연간 1백조원 시장도 가능하다는 얘기다.동대문시장의 역사 및 발전과정동대문시장은 종로 5가 광장시장에서 창신동 문구거리까지 약 1.3km에 이르는 청계천로 좌우와 그 안쪽 골목, 그리고 동대문운동장 주변에 들어서 있는 30여개 상가, 2만7천여개 점포를 통칭한다. 모태는 1905년 설립된 광장시장. 약 1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그렇지만 요즘의 동대문 시장을 놓고 좀더 효과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흥인문로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을 나눠 서부상권과 동부상권으로 나누는 것이다. 시장사람들은 이를 ‘서편제’와 ‘동편제’로 부르기도 한다.서편제는 밀리오레 두타 프레야타운 등 현대식 대형 쇼핑몰을 중심으로 하는 소매상권, 동편제는 청평화 동평화 등 기존 시장에다 혜양엘리시움 디자이너클럽 아트프라자 등이 포진해 있는 도매상권으로 해석되고 있다.동대문 도매상권의 패션전문 시장으로서의 기능확대는 1983년 교복자율화를 분기점으로 하고 있다. 동평화 청평화 남평화 제일평화 흥인 덕운 광희시장 등을 중심으로 의류도매시장을 형성, 지방상인들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동대문 시장은 싸기는 하지만 품질은 떨어지는 속칭 ‘싸구려’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대신 남대문 시장 옷은 ‘남싸롱’제라는 애칭으로 동대문에 비해 좀더 고급으로 쳐주는 경향이 강했다. 이때까지는 남대문이 패션 도매시장으로 더 군림했다는 얘기다.동대문 서부상권은 광고·홍보·마케팅 개념을 도입, 현대적 면모를 갖췄다.동대문이 패션 도매시장으로 남대문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아트프라자의 개점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동대문운동장 공용 주차장 바로 옆에 개점한 아트프라자는 여성 캐주얼을 주력 아이템으로 지방상인들을 끌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당시 남대문 새벽시장이 4시에 개점한데 비해 아트프라자는 밤 12시(새벽 0시) 개점이라는 조기개점 전략에다 각종 경품이벤트로 지방상인들의 발길을 아트프라자로 돌리게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게다가 4년 뒤 개점한 디자이너클럽은 우수한 남대문 디자이너들을 보다 많이 끌어들임으로써 동대문 패션상품의 질적 경쟁력 강화에도 한몫 했다.그런데도 동대문은 98년 밀리오레가 들어서기까지는 여전히 일반소비자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먼’ 시장이었다. 포목시장이란 이미지가 강했던 데다 일반 소비자들을 환대하지 않는 상가 풍토도 일반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던 이유중 하나였다.IMF가 한창이던 98년 밀리오레가 들어서고 6개월 뒤 두타가 들어서면서 동대문은 도매시장의 약화와는 별개로 일반 소비자만을 놓고 볼 때 ‘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상가는 동대문의 풍토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신진 디자이너들을 끌어들여 디자이너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동대문 드림’의 모델을 만들기도 했고 광고나 홍보·마케팅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기존의 시장과 달리 광고·홍보·마케팅 개념을 도입, 현대식 상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또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개장이라는 ‘영업시간 파괴’ 전략을 통해 동대문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으로 만들었다.주말이면 대구 부산 등지에서 학생들이 전세버스로 동대문을 찾아 밤새워 쇼핑하고 가는 진풍경이 연출됐고 외국인 관광의 단골코스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주말이면 평균 20만∼30만명이 동대문 시장을 훑고 지나간다. 이중 외국인은 1만명 수준이다.이들 대형 쇼핑몰이 동대문의 현대화와 소비자 인지도를 높이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로 인한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즉 밀리오레와 두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후 대형 쇼핑몰이 전국 곳곳에 잇달아 들어서면서 쇼핑몰 초과공급을 불러왔고 이런 현상이 결국 상가 부도 및 도매상권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기불황에 따른 ‘오비이락’일 수도 있다.현재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동대문식’ 대형쇼핑몰에 대해 동대문 사람들은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동대문식 쇼핑몰은 원단과 부자재, 생산시설이 갖춰져 있는 동대문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이나 역세권에 대형 빌딩 하나로 ‘동대문식’ 쇼핑몰을 부르짖는 것은 상가분양을 위한 외형 흉내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98년 이후 집중적으로 들어선 대형 쇼핑몰은 결국 25∼40%의 공급능력 확대를 가져왔지만 수요는 제자리걸음이었다는 점에서 공급과잉 상태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기존에 협력관계였던 동부·서부 상권의 도소매 상가가 제살 깎아 먹기식 경쟁관계로 돌아섰다. 최근 동부상권의 대표적 도매상가였던 제일평화 광희시장 덕운시장 남평화시장 등 대부분의 상가들이 낮시간 영업을 하는 것이 좋은 사례다.이런 가운데 혜양엘리시움 등 도매상가는 일본시장 진출 등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고 대형 쇼핑몰 중 비교적 젊은이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난 프레야 타운도 일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밀리오레 두타 등은 N세대 타깃이란 기존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제품의 질 향상을 위한 유망 디자이너 유치와 서비스 향상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두타 마케팅팀 송기용 과장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상가라기보다 하나의 신세대 문화를 창조하는데 중점을 둔 마케팅을 하고 있다”며 “올해의 경우 복제인간 1호의 명칭을 딴 ‘키드-A’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신세대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끼를 소개하는 스타선발대회(월 1회), 두타모델선발대회(6월), 벤처디자이너선발대회 등이 이에 해당한다.이밖에 효율적인 매장구성 및 관리를 위한 백화점식 플로 매니저제, 고객모니터링 제도, 점포별 고객불만 점수화 및 상가 퇴출제도 등도 서비스 강화방안으로 채택됐다. 4월27일부터 5월 첫째주까지 일본 황금연휴를 겨냥한 관광공사의 ‘그랜드세일’ 기간에는 소주와 김치를 세트로 한 선물을 외국인에게 나눠주고 외국인 전용 안내소를 설치하는 등 외국인 공략작전도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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