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일 찾아 매진...사업관련 자격증 따기 혼신 '성공예약'..시험삼아 하는 사업,남는 건 실패뿐.
희망을 안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많은 현지교민들이 속에 담았다 꺼내놓는 말이 있다. “먹고살기 힘들다.” 직업찾기도 마땅찮은 데다 장사라도 하려면 비용이 만만찮다. 게다가 언어소통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데 따른 불편함은 더욱 뼈저리다. 하지만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앞을 가로막아도 대다수 교민들은 이를 이겨내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채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이민생활에 대한 만족감도 상당하다. 그들의 이민담을 듣다보면 공통된 점이 여럿 보인다. 먼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치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며 한 계단씩 올라갔다는 점이다. 가족 특히 부부간의 이해와 격려도 한결같다. 이민생활에서 화목하게 잘 다져진 가정일수록 정착이 빠르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주부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부터 시작해 팔을 걷어붙이고 비즈니스에 뛰어 드는 일까지 마다 않는 가정일수록 뿌리내림이 빠르다. 이민자들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과연 캐나다 이민생활에서의 성공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본다.CTC컴퓨터숍을 운영하는 이은정씨.이은정 CTC 컴퓨터숍 운영이민생활에서 주부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부들의 적극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 토론토 쏜힐지역에서 CTC컴퓨터숍을 운영하는 이은정씨(37)다. 지난 99년 전산프로그래머인 남편과 함께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출장길에 들른 디즈니랜드에서 느낀 문화적 충격으로 아이들에게 보다 큰 세계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한 남편 이기화씨(39)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남편이 막 벤처기업을 동업으로 창업한 뒤라 말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이와 남편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았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그만큼 전형적인 전업주부였다”고.급할 게 없는 이민이었지만 인터뷰를 면제받는 통에 분양받아 잔금까지 치른 아파트를 손해보면서 팔고 부랴부랴 이민길에 올랐다. 손에 쥔 이민자금은 10만달러도 안되는 돈이 전부. 일단 밴쿠버에 자리를 잡았지만 토론토의 인구가 많은 만큼 뭘 하던 보다 쉬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토론토로 옮겼다. “이민 와서 보니 여자들이 할 일이 많다는 것과 아이들이 영어로 스트레스를 의외로 많이 받는다는 점이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는 이씨. 먼저 아이에게 외국아이를 친구로 만들어 주려고 파티를 여는가 하면 외국엄마들과 아이를 초대해 식사를 하는 등 친교를 다졌다. 다행히 아이들의 적응이 빨라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차츰 생활이 안정되면서 가족과 유명한 곳을 놀러 다니며 캐나다 생활을 즐기는 여유도 되찾았다. 미국으로 가족 모두가 6개월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남편이 직장을 잡든가 비즈니스를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딴 판이었다. 남편이 20여곳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언어장벽이 의외로 큰 데다 남편 전공이 메인프레임인데 Y2K가 아무일 없이 지나면서 자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즉시 취업에서 비즈니스로 방향을 돌렸다. 때마침 컴퓨터 조립판매점 수리 컨설팅 교육 등을 하던 매장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가져온 돈 가운데 남은 6만달러를 들여 계약을 맺었다. 비즈니스는 컴퓨터판매와 수리에 집중했다. “가게를 여는 날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상당히 긴장했다”고.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당장 홍보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처리해야 할 일도 수두룩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었다.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뛰는 것 외에는. “하늘같았던 남편도 나와 다를 바가 없으며 결국 같이 짐을 짊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게다가 남편이 조립을 하고 영업을 해야 하는 처지라 부품 구입을 위해서는 이씨가 직접 나서야 했다. 컴퓨터도 모르는 처지였지만 미시사가 등 먼 곳도 마다 않고 보다 싼 부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루 꼬박 3~4시간씩 운전대를 잡는 일과의 연속이었다. “죽기 살기로 덤볐으며 할 일이 있다는 게 마냥 즐거웠다”는 이씨의 기억이다. 덕분에 8개월 정도 지나면서 가게운영에 자신감이 붙고 외국인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도 빛을 봐 한국인 대 외국인 고객 비율이 6대4를 차지할 정도로 영업이 자리를 잡았다. 보다 싼값에 부품을 조달하게 되면서 마진율도 높아졌다. 그만큼 수익도 늘어 지난해에는 단독주택도 구입했다.“이민 온 주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도 많고요. 다부지게 맘먹고 헬퍼라도 한다면 그만큼 가족에게 힘이 되고 이민생활의 안정도 빠르지 않겠어요? 참, 이것만은 고쳤으면 해요. 한국 아줌마들이 한국인 가게에 가면 세금없이 달라는 등 악착같이 한푼이라도 깎으려고 하면서 왜 외국인 가게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영어공부도 좀 열심히 하시고….”서튼그룹 부동상중개인.장홍순 서튼그룹 부동산중개인밴쿠버시내에서 도로를 지나다보면 벤치의 등받이에 광고물을 댄 벤치사인을 수없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버나비지역의 한인상가 밀집지역인 노스로드로 가다보면 한국인의 얼굴이 걸린 벤치사인이 나타난다. 캐나다 최대의 부동산업체인 서튼그룹(Sutton Group)의 부동산중개인으로 근무하는 장홍순씨(40)의 광고물이다. 이민 후 호구지책의 일거리를 찾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정해놓고 한 우물만 파 자리를 잡은 케이스다.“한국에서는 혼자 노력해서 무언가 이뤄야 하는데 불합리한 점이 많고 비전 특히, 아이들의 비전이 없어 보였습니다.” S전자를 거쳐 외국계 솔루션업체인 인터그래프에서 세일즈매니저로 근무하던 장씨가 캐나다이민을 결심한 동기다. 지난 95년의 일이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이민생활이 녹록하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서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는 이중의 두려움으로 간혹 아찔해지기도 했다.일단 밴쿠버에 도착하자마자 각오를 다지고 2년제 직업전문대학인 BCIT에 등록해 영어와 비즈니스에 필요한 과목을 수강했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생각으로 영어와 캐나다의 비즈니스에 대해 치밀히 알아두자는 심산에서 였다. 차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동산중개사였다. “한국과 달리 캐나다의 부동산중개인은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사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면서 도전할 결심이 섰다”고. 96년부터 부동산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브리티시콜롬비아주에서 공인 과정을 듣고 기초자격증시험에 응시, 1백86명 가운데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이듬해에는 브리티시콜롬비아주 부동사중개인협회의 연수를 받고 로열 르페이지(Royal Le Page)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취업했어도 일감이 없으면 주수입원인 커미션이 없으므로 수입이 없는 생활이 계속됐다. 한국의 부모에게 원조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상업용 부동산거래자격증, 북미주 부동산비즈니스 트레이닝 프로그램, 브리티시콜롬비아주 부동산위원회의 부동산중개사 자격증을 잇달아 수강하며 자격증을 땄다. “수입이 없어도 중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자신에게 계속 투자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고.직장도 교민들이 많이 몰리는 신흥개발지역인 코퀴틀람의 서튼으로 옮겼다. 꾸준한 자기계발과 발로 뛰는 장씨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차츰 계약이 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신에 대한 투자를 계속, 캐나다에서 통하는 부동산자격증 가운데 최고로 권위있는 ‘에이전트 9.15’까지 땄다. 이를 계기로 밴쿠버전역의 부동산중개를 커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 다시 버나비 서튼으로 옮겼다. 상업용과 주택거래를 함께 하던 것도 주택거래로 집중했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차츰 실적이 오르면서 수입이 늘어 지금은 “아주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고.“중국인들이 서로 뭉치고 도와주면서 캐나다 주류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이민자의 후손들이나 나중에 이민 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토대가 마련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이민생활에는 뚜렷한 목표와 적극적인 자세가 필수적이라며 장씨가 밝힌 앞으로의 목표다.김범기 모토포토숍 사장.김범기 모토포토숍 사장치밀한 준비만이 이민자가 사업에 성공하는 지름길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김범기씨(45)의 이민담이다. 토론토의 금융중심가인 아델레이드거리에서 모토포토숍(Motophoto)이라는 상호의 포토숍을 운영중이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S종합상사가 현지에 세운 합작사 사장으로 근무하던 김씨가 이민을 결심한 계기는 남들과 다른 종교적 이유. “말레이시아에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집안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한국을 방문해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곤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돌파구로 생각해낸 것이 이민이었다. 물론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정작 큰 이유는 보다 마음놓고 교회를 다닐 수 있는 환경이었다. 97년부터 이민을 심각히 고려하던 김씨는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게 지난 98년. 다행히 말레이시아 지사장으로 근무할 때의 마케팅경력을 인정받아 인터뷰가 면제돼 바로 독립(기술)이민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 가진 돈은 모두 10만달러 가량. 일단 토론토로 갔다. 비즈니스를 할 생각이 있었기에 사람이 많은 토론토가 적합하다 생각해서 였다. 한국인들의 편의점 패스트푸드 세탁소 등을 유심히 살폈다. 그 중 세탁소와 편의점은 육체적으로 힘든 데다 주일예배를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바빠 종교적 이유에서 일단 배제했다.결국 남은 것은 프랜차이즈. 일단 신문광고에 난 프랜차이즈들을 꼼꼼히 살폈다. 브랜드네임이 알려진 프랜차이즈와 10만달러를 갖고 할 수 있는 종목으로 범위를 정했다. 그러나 대부분 30만달러가 최소투자액이었다. 누군가 파이낸싱을 해줄 수 있고 일요일은 교회를 갈 수 있는 종목을 찾다보니 결국 오피스타운을 끼고 있는 프랜차이즈로 좁혀졌다. 여기에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업종으로 기왕이면 취미를 살릴 수 있는 조건을 추가했다. 결국 포토숍이 생각났다. 대학시절 사진에 많은 취미를 기울였던 데다 계열사에서 만들어낸 카메라를 해외에 판매하면서 세팅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누가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겠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서구인들의 집마다 사진액자들이 집안 곳곳에 널렸을 정도로 사진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일단 신문광고에 나온 50여 개의 포토숍을 찾아 두달간 4만km가 넘게 돌아다녔다. “신문광고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업자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카메라 관련지식이 늘고 영어향상에도 많은 도움이 돼 지금은 현지인들이 칭찬할 정도가 됐다”는 게 김씨의 말이다.그러던 중 발견한 곳이 바로 지금의 가게. 모토포토 본사직영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본사를 찾아가 5천달러를 공탁하고 자료를 받아 분석했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자신에게 가게경영을 넘겨달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캐나디안 익스피리언스가 없어 곤란하다는 것.하지만 역으로 카메라와 관련된 해외세일즈 경험과 말레이시아법인의 마케팅경력을 강조했다. 오히려 파이낸싱만 해주면 성공할 자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본사로부터 OK사인과 함께 12만달러의 파이낸싱을 받아냈다. 그게 지난 99년 4월. 그 다음달 가게를 열고 영업에 들어갔다.그러나 예상처럼 만만하게 풀리지 않았다. 종업원관리의 어려움, 좀처럼 단골가게를 바꾸지 않는 캐나디안들의 보수성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반경 2백m내에 6개 업체들이 몰려 경쟁도 치열했다.결국 품질과 서비스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판단, 1년 정도 캐나디안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했다. 그 과정에서 캐나디안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는 정확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친절이나 품질은 그 다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의 입맛에 맞추는 방법으로 영업전략을 바꿨다. 여기에 고객들의 이름과 특징을 외우고 다시 찾으면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하거나 바로 사진을 찾아 건네주는 등 고객흡인에도 노력을 다했다.“한두번 방문한 자신을 기억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놀란 캐나디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그 뒤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멤버십회원이 순간적으로 1천명을 훌쩍 넘어섰으며 지난해만도 3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포토숍의 마진율이 현상 60∼65%, 액자 필름 등의 판매가 50% 정도임을 감안하면 지난해 김사장은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요즘도 하루 1백명 정도가 가게를 찾을 정도로 성업중이다. 가게가 안정되면서 지난해에는 키르키스스탄에 단기선교도 다녀올 정도로 여유를 찾았으며 리치몬드힐에 번듯한 집도 구했다.“캐나다달러가 1달러에 1천3백원을 웃도는 때 이민을 와 한달에 기본생활비로 4천달러씩 나가는 것을 보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달려 들었습니다. 이민자가 사업을 하면서 ‘연습삼아’ 또는 ‘시험삼아’라는 마음으로 한다면 절대 자리를 못 잡습니다.” 프랜차이즈를 해보라는 주변 권유도 고려해 봤지만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보류했다는 김씨가 이민 준비자들에게 전해주는 충고다.김정남 짐 패티슨 도요타 자동차딜러.김정남 짐 패티슨 도요타 자동차딜러캐나다 이민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장 자주 강조되는 게 영어능력이다. 밴쿠버 서리지역의 자동차매매단지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짐 패티슨 도요타(Jim Pattison Toyota)에서 자동차딜러(세일즈&리스컨설턴트)로 일하는 김정남씨(30)가 이런 영어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이민자다.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영어에 귀와 입이 트이면서 원하는 자리를 잡았다.김씨가 캐나다에 도착한 것은 지난 92년. 캐나다교포인 아내와 만나 결혼초청이민으로 왔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이민이었지만 도착 후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글로서리점원 청소부 태권도장 교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부부가 함께 화장실을 청소하는 설움도 느껴야 했다. 가져온 돈도 당시 3백만원밖에 안돼 쪼들리는 생활이 이어졌다. “은행잔고로 남은 전재산이 1백50달러밖에 안됐던 때도 있었다”고. 그러던 중 부인이 여행사에 취직을 하고 덕분에 여행가이드를 하게 됐다. 간만에 단순노무직을 벗어났지만 그것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여행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다시 실직자가 됐다.그후로도 식당 설거지 건강식품 영업 등 ‘직업유랑’이 계속됐다. “외국사람의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안돼 시도 한번 못한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그러나 이민생활 6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귀와 입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언어가 된다고 생각, 이력서를 만들어 자동차딜러숍에 돌렸다.마침 다임러 크라이슬러에서 인터뷰를 갖자고 했다. 버나비에 한국인들이 많아 한국인을 많이 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3개월의 채용유예기간을 갖기로 하고 채용이 됐다. 첫달 8대를 팔았다. 그러나 다음달 2대로 곤두박질.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발로 뛰었다. 덕분에 숍에서 톱세일즈맨이 됐다. 그후 승승장구, 가장 실적이 우수한 직원에게 주는 ‘프로페셔널 세일즈 멤버십’도 받았다. 이민생활을 힘들게 한 영어도 이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늘었다. 영어를 잘 하면 다른 직종으로 전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차딜러가 체질에 맞아 한 자리를 고집했다.그러던 중 짐 패티슨으로 옮길 기회가 생겼다. “캐나다에서 굉장히 규모가 큰 기업이라 안정된 데다 수많은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라 무슨 물건이든 팔 수 있다는 생각”에 회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딜러 중 한명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지난 2월에는 새로 지은 단독주택도 구입했다. 모두 영어가 되면서 가능해진 일들이다.“처음 이민왔을 때는 후회도 많이 하고 벌판에서 혼자 술먹고 고함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꿈이 있습니다. 고객관리를 잘해 중고차와 새차를 함께 판매하는 작은 회사라도 차려 경영해 보고 싶습니다. 짐 패티슨회장도 중고차판매에서 시작해 자산규모 30억달러의 회사로 키웠습니다.” 이민생활에서 영어와 자신감은 ‘필수’라는 것을 체험했다는 김씨가 이민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말이다.오승환 컴퓨터 프로그래머오승환 프레데터그룹 컴퓨터 프로그래머“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스킬업데이트 (Skill-Update)만이 캐나다에서의 서바이벌게임의 첫째 룰입니다.” 토론토 외곽 신흥주택단지인 메이플지역의 집에서 만난 오승환씨(45)의 첫마디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전산프로그래머였지만 이민바람에 휩쓸려 왔다가 녹록하지 않은 현실과 부대끼면서 갖게 된 경험 룰이다.지금 프레데터그룹(Predator Group)이란 캐나다기업에서 e-commerce 개발담당 프로그래머 애널리스트로 근무 중인 오씨가 ‘아무 생각 없이’ 캐나다에 도착한 것은 지난 98년. 전산인력에 대한 캐나다측의 수요가 한창 높은 때였다. 같은 전산프로그래머로 일하던 부인과 맞벌이로 모은 돈 30만달러를 들고 밴쿠버공항에 내렸다.살기 좋다고 소문나 택한 밴쿠버였지만 고용시장이 작다는 생각과 아이들의 대학진학을 고려해 10개월만에 토론토로 옮겼다. 토론토는 밴쿠버와 달랐다. 도시인 만큼 생활비도 많이 들고 생활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말의 불안감도 들었다.적극적으로 자기계발에 나섰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택한 이민길이었지만 캐나다 컴퓨터언어와 특성을 알아야 취업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세네카대학에서 4개월짜리 웹마스터강의를 6천5백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수강했다. “메인프레임이 전공이었는데 클라이언트베이스의 기술을 배워 스킬을 업데이트할 기회였다”는 게 오씨의 기억이다. 과정 수료후 3개월간 조교생활을 했다. 마침 교육을 받은 학생이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 그를 통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입사했다. 지난해 11월의 일이다.한국에서 잘 나가는 프로그래머였지만 스킬업을 통해 이민생활에 정착한 만큼 요즘도 오씨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특히 클라이언트 서버환경에 재미를 붙여 봉급을 받으면서 경력도 쌓고 일도 배우는 1석3조를 거둔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산인력들 가운데 일부가 아직도 이민에 대해 집착하는 데에는 따끔한 충고를 빠뜨리지 않았다.“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국에서 노력하고 사는 것이 나은 것 같아요. 만약 꼭 이민을 가야겠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영어실력을 쌓고 사전에 충분히 알아본 후에 준비하고 와야 합니다. Y2K로 좋아질 것이라고 해서 왔지만 다른 직종으로 전직하거나 감원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어가 가장 큰 이유지요. 때문에 한국 전산인력에 대한 시각도 다소 부정적으로 변했습니다.”실패사례 / 이민 만만히 보면 다친다일거리 없어 ‘막막’, 하루하루가 바늘방석많은 캐나다 이민자들이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생활을 하고 있지만 반대로 당초 기대했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민생활로 고단한 시간을 보내거나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개중에는 IT인력 가운데 기술이민으로 왔다가 비자기간이 끝나면서 재취업을 하지 못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사람, 일거리를 얻지 못해 가져온 돈을 곶감 빼먹듯 쓰며 불안하게 사는 사람, 이민 후 현지적응의 어려움으로 가족간 불화가 생겨 고민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토론토 노스요크의 한 콘도에서 만난 정길호씨(38, 가명)도 그런 경우다. 재벌그룹 계열사인 H사에 근무하다가 지난 5월말 캐나다에 도착했다. 10여년 전에 이민온 형의 초청이민인 데다 엔지니어란 점이 이민심사에서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집을 정리한 돈과 그간 직장생활로 푼푼이 모았던 10만달러 가량을 들고 왔다. 그러나 “당초 막일이라도 할 생각으로 이민을 택했다”는 정씨지만 막상 토론토에 도착해보니 상황은 생각보다도 훨씬 나빴다. 일단 일거리가 없었다.당장 생활할 곳이 급해 교민들이 많이 산다는 노스요크지역에서 4인 가족이 지낼 콘도를 월 1천7백달러에 구했다. 집을 구하고 보니 돈 나가는 게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자리가 급했다. 그러나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세일즈부서에서 근무해 대학전공과 직장경력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공장에 들어가 단순노동이라도 할 요량으로 기웃거렸지만 그것도 한인끼리 경쟁이 심해 언제 자리가 날지 모르는 상황이다.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하는 것. 하지만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길에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집안에 부인과 단둘이 있자니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는 게 정씨의 말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각오가 있으니 언젠가는 일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이곳 저곳에 일자리를 부탁했다. “(교민들)이야기를 들어보니 S전자 연구원 출신의 한 이민자는 밤에 지렁이를 잡으러 다닌다고 하더군요.한 깡통을 잡으면 25달러를 받는다나요. 정 안되면 그거라도 해야죠.” 이민을 고려중이라면 진지하게 심사숙고하라고 충고해주고 싶다는 정씨의 짧은 이민생활은 아직 고단하기만 하다.이민신풍속도 ‘기러기아빠’별거 이민 속앓이 … “뭉치고 싶다”‘기러기아빠’.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부인과 아이들만 현지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일을 하면서 돈을 송금하는 가장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 캐나다 교민사회에서는 이런 기러기아빠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개중에는 조기유학을 왔다가 아예 이민을 신청하고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민초기 1∼3년간 캐나다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돈을 까먹느니 가장이 한국에서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 한푼이라도 버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정모씨(39)도 그런 케이스다. 한국의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떨어져 토론토에서 2명의 자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 남편과는 매일 인터넷 화상전화로 통화를 하면서 가장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래도 가장이 없으니까 어렵다”는 정씨는 “별거이민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남편이 미국 디트로이트나 토론토 근처에 있는 같은 회사의 공장으로 오려고 노력중이어서 멀지않아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희망과 다른 별거이민 가족들도 대개 1년 안에 뭉친다는 주변 이야기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정씨가족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많은 별거이민자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교민사회에서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때문에 웬만하면 별거이민을 하지 말 것을 권한다. 밴쿠버 광림교회 박신일 목사는 “가뜩이나 남편의 가정내 정체성이 약해지고 합리적인 문화를 접한 청소년들이 부모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실망을 해 상담하는 경우가 많은 데 별거이민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소지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밴쿠버의 별거이민 가족 가운데 보이지 않는 심각한 갈등으로 상담한 가족도 여럿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토론토에서 유학생과 이민자 자녀들의 교육관련 조언을 하는 캐나디안컨설턴트의 유형호 이사도 “요즘 랜딩하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별거이민자일 것”이라며 “나이가 많은 자녀일수록 탈선 가능성이 높은 게 이민생활인데 대다수 주부들이 학교행사라면 자녀들에게 손을 드는 등 자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어른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로 우려를 나타냈다.성공 이민 십계명이민의 뚜렷한 목적을 가져라신세계이주공사 박필서 대표는10여년 간의 이민컨설팅으로 이민생활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해 성공이민 10계명을 만들어 이민준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 이번 현지취재과정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낀 점들과 일치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1. 이민의 뚜렷한 목적을 가져라.2. 이주공사 선정시 심사숙고하라.3. 본인과 가족에게 가장 잘 맞는 정착지를 선정하라.4.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 정착을 앞당겨라.5. 현지 정보를 많이 입수하고 철저히 분석한 후 준비하라.6. 젖먹이 사고방식을 갖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잊고 자신을 낮춰라.7. 친구 친지 선후배 등 아는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라.8. 이민간 지 오래된 사람과 친구가 돼라.9. 현지 신문 및 잡지를 구독하고, 새로운 기회와 찬스를 잡아라.10. 늘 작은 것에 감사하며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