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서 실전 경험 쌓자” …너도나도 출국

하루 3백~4백명 연수·문화체험 훌쩍 … 지난해보다 여권 발급건수 대폭 증가

방학을 이요해 어학연수를 떠나는 초등학생들로 붐비는 인천국제공항.지난 7월24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로비. 휴가 방학 등을 맞아 출국을 하려는 사람들로 번잡한 가운데 유난히 소란스런 곳이 눈에 들어왔다. 40여명의 어린이들이 인솔자의 지시사항을 들으랴, 출국신고서를 적으랴, 친구와 장난치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방학을 맞아 미국과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초등학생들. 공항종합안내센터 이은숙씨는 “방학전만 해도 출국하는 아이들이 드물었지만 요즘에는 10∼30명씩 소그룹으로 이뤄져 어학연수를 가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며 “하루 3백∼4백명정도가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팀단위 영어연수생 북적요즘 인천국제공항에는 이처럼 팀을 이뤄 외국으로 영어연수를 떠나는 초등학생들로 북적거린다. 보통 한번 연수에 적게는 3백만원에서 많게는 5백만원 이상의 목돈이 들어가지만 행렬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날 공항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생 김형민군은 “영어학습업체에서 모집해 떠나는 미국 어학연수로 20일 일정에 4백18만원이 들었다”며 “방학 때 연수를 떠나는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목동 E-Net영어학원의 제정모원장도 “대개 영어학습지를 구독하며 영어학원에도 다니지만 방학을 이용해 ‘실전경험’을 쌓으려고 떠나는 아이들”이라며 “초등학생 10명 가운데 3명 정도가 떠난다고 보면 될 정도로 어학연수가 유행”이라고 말했다.이러한 어학연수바람이 비단 특정계층이나 특정지역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서울 대치초등학교 한 교사는 “몇년전만 해도 부유하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이 주로 연수를 나갔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자녀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방도 상황은 비슷해 많은 초등학생들이 어학연수 바람을 타고 있다. 대구 경북사대부속초등학교 교사 유정애씨는 “예년 같으면 어학연수를 위해 서류를 발급받는 아이들이 한 반에 3∼4명정도였으나 올해 들어 10명 이상을 끊어줬다”며 “다른 교사가 발급한 것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욱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 정철어린이영어학원의 장명희씨도 “부모들 가운데 3∼4주짜리 영어연수를 보내려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어학연수붐이 확산되는 것은 여권발급건수로도 확인된다. 강원도청 민원실의 원영희계장은 “초등학생들이 방학을 앞두고 어학연수 문화체험 외국여행 등을 위해 여권을 발급받는 사례가 예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며 “이는 아마도 전국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경남지역의 초등학생 가운데 올해 5월말까지의 여권을 새로 발급받은 학생들이 전년대비 18%나 늘어난 9백37명에 이르며 경기도의 경우도 하루에 1천건에 가까운 여권신청이 몰리기도 했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영어학습지 업체나 영어학원 업체 등에서 모집하는 어학연수에는 서로 자녀들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경쟁이 붙기도 한다. 윤선생영어교실 동수원지사의 한 관계자는 “매년 본사에서 주관하는 어학연수에 보통 5∼7명을 보내는데 모집공고가 나가면 곧 바로 마감돼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뿐만 아니다. 어학연수붐이 일면서 자녀들이 연수를 보내달라고 졸라 난감해하는 부모들도 적잖다. 초등학생 2명을 둔 목동 사는 주부 정명주씨는 “방학전에는 2∼3명, 방학중에는 10명 가운데 3∼4명이 갈 정도로 어학연수가 보편화되면서 아이들이 보내달라고 조른다”고 말했다. 정씨는 또 영어연수붐에 대해 “영어를 못하면 못살지 않느냐. 조바심이 난다”며 “단기연수의 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해 아직 보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보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초등학생들의 어학연수붐에 편승해 방송사와 신문사 등 언론기관, 영어학습업체, 외국문화원 등도 어학연수 문화체험 등의 이름으로 연수상품을 마련해 학생들을 모집하는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유학상담업체들의 모임인 한국유학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는 미래교육 이성민원장은 “어학연수시장에 이런 곳들이 뛰어들면서 전국 4백여개 유학상담업체들이 악전고투중”이라고 말했다. 공신력이 있다고 판단한 부모들이 그쪽으로 몰린다는 것이다.이처럼 어학연수가 붐을 이루는 가운데 아예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현재 정확한 조기유학생의 집계가 파악되지 않지만 지난해 교육인적자원부가 전국 1만여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지난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조사한 결과로는 모두 2천8백74명에 이른다.(표 참조)‘아예 외국으로…’ 조기 유학 열기 여전올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비유학조건이 중졸이상으로 규제됐지만 유학을 떠나려는 초등학생들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삼미유학원의 구자현씨는 “가디안비용이나 홈스테이 등으로 초등학생유학이 성인유학보다 비용이 많이 들지만 미국 영국 캐나다 등으로 자퇴를 해서라도 조기유학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 재능교육과 한국갤럽이 6대 광역시 초등학교 4학년생부터 중학교 3학년생까지 학생 8백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조기유학을 가고싶다’는 응답이 전체응답자의 34.6%나 차지해 많은 청소년들이 유학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한편 조기유학이나 어학연수가 초등학생들 사이에 붐을 이루는 것에 대해 일선 초등학교 교사들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다. 지난 97년부터 초등학교에도 영어교육이 정규교과목으로 마련돼 있어 이를 잘 활용하면 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안동 북후초등학교 교사 권태만씨는 “학부모들이 학교의 영어교육프로그램을 믿지 않고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가자는 의욕이 넘쳐 이런 현상이 생긴다”며 “현재 초등학교영어교육이 의사소통능력배양을 일차 목표로 하는 만큼 믿고 따라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초기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능력을 비교 관찰한 글을 현직 영어교사들의 웹저널인 ‘바른영어교육’에 쓰기도 했던 유정애씨는 “1~2년 체류한 학생들은 회화능력이 뛰어났지만 단기연수생들의 경우 국내 사설학원을 다니는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사례 분석조기 유학 / 캐나다 밴쿠버 성선영씨“영어만큼은 확실히 공부시키기 위해 유학 결심”요즘 조기유학이나 어학연수로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이 캐나다다. 다른 영어권 국가에 비해 비용이 저렴한데다 북미영어를 한다는 매력 때문에 한국학생들의 선호도가 높다. 웨스트 밴쿠버에 자리잡은 할리번(Hollyburn)초등학교도 그런 예. 몇 년전만 해도 4~5명의 교민자녀들만이 다녔지만 작년부터 유학생이 갑작스레 늘어나 지금은 전체학생 3백여명 가운데 10%정도를 한국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학교근처에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많고 교과목에 외국학생들을 위한 영어학습과정(ESC)이 운영돼 한국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이 곳에서 만난 성선영씨(37)도 이런 장점들을 고려해 지난해 여름 13세 아들과 12세 딸을 이 학교에 유학보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공부를 시키고 방학 때에는 미국 어학캠프에 보내기도 했지만 영어실력향상에 크게 도움이 안돼 유학을 결심했다”고.학교근처의 아파트를 월 1천3백달러에 빌려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는 성씨의 일과중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들 등하교 때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 오는 일. 나머지 시간도 자녀들을 보살피는 게 전부다. 남는 시간에 본인의 영어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다른 소일거리가 없어 단조로운 생활이다.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문화적 차이마저 시간이 갈수록 커 어려움도 느낀다. 하지만 “아이들의 유학생활로 얻는 성과에 대한 기대로 버틴다”는 게 성씨의 말이다. “(자녀들이)영어 하나만큼은 확실히 떼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의 성격이 외향적이라 적응이 빨라 영어실력이 기대이상으로 늘었다는 것이 1년간의 조기유학을 통해 성씨가 얻은 성과물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의사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가 돼 조기유학에 만족하고 있으며 가능하면 졸업까지 할 생각”이라는 게 성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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