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어도 투신사·종금사 초단기상품에만 몰려 … 유동성 함정 우려도
처저금리가 2년동안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을 흘러 넘치는데 실물 경기는 여전히 나빠지고 있고 주식시장 돈이 몰려갈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경제학 교과서에선 금리가 내려가면 투자와 소비가 늘고 주식시장이 활기를 띠게 된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사상 유례가 없는 초저금리가 2년 동안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은 흘러 넘치는데 실물경기는 여전히 나빠지고 있고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려갈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젠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판이다.한국은행은 올들어 세차례(2, 7, 8월)콜금리를 0.25%포인트씩 연 4.5%로 내렸다. 그 덕에 지표채권인 3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연 5%선에 바짝 다가섰다. 종전 연중 최저치(2월12일 5.0%)를 경신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일부 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연 4%대로 내려갔고 연 6%대인 초저금리 대출까지 등장했다. 국민 주택은행의 통합은행장에 내정된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수신금리를 더 낮출 태세여서 은행권의 여수신금리 인하경쟁은 지속될 전망이다.돈값이 이만큼 싸졌는 데도 실물경기는 날개없이 추락하고 있다. 지난 6월 산업생산은 32개월만에 처음 감소세(-2.7%)로 돌아섰다. 7월 수출은 20%나 급감하면서 사상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설비투자는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감소상태다. 소비도 지난해 8%대였던 증가율이 올들어 4%대로 뚝 떨어졌다. 주가는 연초보다는 올랐지만 종합주가지수 500대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보인다.더욱이 지난해 8월이 경기 사이클상 호황기의 정점이어서 올 7~9월중 전년동기대비 실물경제 통계는 더욱 나빠 보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골드만삭스같은 외국증권사들은 한은이 콜금리를 연말까지 연 4.0%로 0.5%포인트 더 낮추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주식, ‘고위험’ 기피자산 분위기 팽배금리를 내려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나 주식시장으로 돈이 흘러 가길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경제 불확실성으로 인해 안전자산 선호, 유동성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기업은 회사채를 발행해 설비투자가 아니라 빚갚는데 주로 쓸 뿐이다. 주식은 확실한 신호가 보이기 전까진 여전히 ‘고위험’ 기피자산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금리와 다른 경제변수와의 상관관계가 미약해지면서 일본식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운찬 서울대 교수는 아예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단언한다. 돈을 풀어도 금융기관에서만 맴도는 점을 증거로 제시한다.이에 대해 전철환 한은총재는 “한국은 유동성 함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반박했다. 경기부진이 심화된 탓에 유동성 함정과 비슷한 징후가 나타나지만 통화동향에선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마이너스 성장, 물가 하락 등 디플레가 뚜렷한 데 반해 한국은 아직 높은 물가상승률, 부동산가격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하지만 나타난 현상만 놓고 보면 금리를 제로로 낮춰도 실물경기가 10년째 장기불황을 겪는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은 외환위기 초기 연 30%를 넘나들던 시장금리가 5%대로 낮아졌어도 투자가 줄어 성장률을 까먹고 있기 때문이다.경기하강, 대내외 경제불안 요인 등을 감안할 때 이같은 추세는 경기회복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적어도 올연말이나 내년초까지는 시장금리가 다시 오를 요인이 별로 없다는 공감대가 채권시장에 형성돼 있다. 이는 금리와 주가의 대체관계가 사라져 저금리가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얘기와도 통한다.4%대로 떨어진 정기예금에 만족하지 못한 시중자금은 은행에서 빠져 나오고 있지만 기착지는 주식이 아니라 투신 종금 신용금고 등 제2금융권의 단기상품들이다. 만기 6개월이내의 단기상품 수신고만 한없이 늘어난다.은행권 수신은 저금리 속에서도 지난 6월에는 7조9천억원이나 급증했다. 금리는 낮아도 무엇보다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7월에도 비슷한 수준의 증가세를 유지하다가 은행 수신금리 인하가 본격화되면서 거꾸로 3조5천억원이 빠졌다. 은행권 자금이탈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은행 총예금은 7월말 4백44조2천5백억원. 이중 비교적 만기가 긴 정기예금은 45%인 2백3조9천5백억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기상품에 들어 있다. 금리하락이 시중자금의 단기 부동화를 부채질한 셈이다.은행에서 빠져나온 돈은 고스란히 투신사로 옮겨갔다. 투신사는 지난 4월말 시장금리가 급등(채권값 급락)할 때 12조9천억원이나 빠져 나가 큰 어려움을 겪었었다. 5월 3조1천억원, 6월 9천6백억원 등 자금유입폭이 미미하던 것이 7월엔 13조2천6백억원이나 급증했다.투신사의 수신 역시 주로 단기채권형펀드와 MMF(머니마켓펀드)로 몰렸다. 7월중 두 상품에 10조5천억원이 유입됐다. 장기채권형펀드(1조3천1백억원)와 혼합형펀드(1조3천7백억원)에는 상대적으로 자금유입이 미미했다.매달 감소하던 종금사 수신도 7월중 5천4백24억원이 늘었다. 결국 시중자금은 은행의 CD(양도성예금증서), 투신사 MMF 단기채권형펀드, 종금사 자발어음 등 초단기 상품에만 몰려간 것이다. 고객예탁금이 거의 정체상태인 것과 너무 대비된다.금리 오르는 시점 주식 매수 의견도환율도 주가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변수가 되고 있다. 물론 외국인들이 주식을 사고 팔 때 환율이 영향을 받지만 환율변동 탓에 주가가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경제전문가들은 주식시장이 자금흐름에서 소외된 이유를 경제의 불확실성에서 찾는다. 어음부도율 실업률 등이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안정돼 있지만 일부 대기업의 처리지연에서 비롯된 불안심리가 경제와 주식시장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는 “풍부한 유동성이나 금리하락이 무엇보다 경제 불안심리, 경기부진의 결과물로 나타난 만큼 저금리기조가 경기나 주가를 활성화시키길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역설적으로 일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금리가 오르는 시점을 주식매수 타이밍으로 잡기도 한다. 저금리나 증시침체의 원인이 공통적으로 경기부진이란 점에서 경기 모멘텀의 일대 전환이 가시화돼야 금리도 오르면서 주가도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