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기술 갖고 창업·가격 후려치기 등 우월적 지위 이용, 불공정거래 다반사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거래 상대방에게 계약상 불이익을 주는 행위가 경제계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이건 갑이 아니라, 수퍼 갑이에요. 어느 나라 공기업이 벤처기업의 핵심 기술을 공개하라고 요구합니까. 팬티까지 벗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풍토에서 사업할 맛이 나겠습니까.”이제 창업한 지 3년째 접어들고 있는 벤처기업가의 토로다. 그는 서울시내에서 보안관련 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갑의 횡포’ 때문에 해외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핵심 소스코드를 공개하지 않으면 하도급 계약을 맺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하는 갑 기업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다.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업하지 않았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그가 주로 횡포를 경험한 갑은 공기업이다. 이들은 공공기관이라는 점을 내세워 기업에서 수년간 투자해 개발해 놓은 기술을 ‘그들에게만’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마지막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만 남은 벤처기업가는 이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이다. 지금껏 공들여온 과정을 생각하면 계약포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불리한 계약서에도 속수무책“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계약을 벤처기업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와 계약을 맺었느냐에 따라 기업의 기술력이 입증됩니다. 공공기관과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으면 경력으로 인정되는 거죠. 이걸 공공기관의 계약 실무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같은 관행을 역이용하는 겁니다.”그가 전하는 좀더 충격적인 증언은 “공공기관 실무자들이 벤처기업과 일하면서 습득한 기술을 자기 것처럼 가장해 창업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이런 일이 많습니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출신 엔지니어가 어느날 갑자기 창업하고 개발한 기술을 공개하지만 그 기술이 어떤 기업에서 나왔는 지 대부분 알려집니다. 그렇다고 관련 기업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어요. 변호사 선임하고 소송을 걸어 승소할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당장 생존하는 것이 바쁜 벤처기업으로선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공기업이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거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지난해 공정위는 공기업을 조사한 결과 “매년 공기업에 대한 직권실태 조사에도 법 위반 사례가 근절되지 않고 동일한 행위가 반복됐다. 또 다수 공기업에서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거래상대방에게 계약상 불이익을 주는 행위가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고건수도 계속 증가 추세다. 실제 지난해 공공사업자에 대한 불공정거래행위 신고건수는 총 4백8건으로 99년 3백89건에 비해 5%가 증가했다.엄기섭 경쟁촉진과 사무관은 “민간업체는 공공사업자와 계속적인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불이익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며 “이는 공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관행화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불공정거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에도 빈번히 일어난다. 서울 여의도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K사장 역시 갑의 횡포를 경험했다. 그가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계약서를 쓸 때 대기업에서 제시하는 ‘대금 지급 조건’에 관한 규정이다.“계약서에 이렇게 씌여 있어요. ‘대금지급 조건은 당해 회사 규정에 따른다’. 당해 회사 규정이 뭔지 설명도 없습니다. 제품을 받았으면 언제까지 돈을 주겠다는 언급이 있어야죠. 회사 규정이 1년 내에 지급하겠다는 건지, 입맛에 안 맞으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지 누가 압니까. 제가 좀더 기간을 명확하게 하자고 요구하면 대기업 실무자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오히려 면박을 줍니다. 어디 대기업에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K사장은 오랫동안 외국기업에서 일한 것 때문인지 이런 관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창업한 지 4년째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해 겨우 적응하고 있지만 대금지급 조건만큼은 명확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그의 노력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모르지만 거의 예외없이 대기업은 이런 터무니없는 계약조건을 약자 기업에 들이밀고 있다.최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하도급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맺는 사례가 늘어나자 실태조사에 나섰다. 대기업들이 앞을 다퉈 긴축경영에 들어가자 이같은 피해 사례는 급증하고 있다.분쟁조정위원회에서 밝히는 대기업의 횡포유형은 두 가지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원칙 없이 제품의 단가를 ‘후려치는’ 것이다. 대기업과 꾸준히 협력업체 관계를 맺어온 중소기업일수록 이런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장윤성 하도급분쟁조정위 과장은 “최근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중소기업들의 피해실태를 조사한 결과 대기업이 해마다 최소한의 협의도 없이 제품 단가를 3~5% 낮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장과장은 “명백하게 대기업의 잘못이지만 중소기업에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며 “신고라도 하면 거래가 끊기는 데 누가 모험을 하겠느냐”고 전했다.이 때문에 중소기업은 나름대로 제품개발에 따른 개발비용 등을 제품가격에 반영시키지못하고 있다. 이는 대기업의 무리한 인하요구→저질품 생산→대기업 제품 경쟁력 하락 등 악순환으로 이어진다.최저입찰제는 대기업에만 유리남동공단에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한 업체 사장은 “무작정 제품가격을 깎으려고만 하지 협의나 협상은 없다. 이 조건을 받지 못하면 다른 업체와 하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직원들의 고혈을 짜내 대기업의 이윤을 보호하려는 이런 발상으로는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모두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고 그는 잘라 말했다.둘째, 중기협 분쟁조정위는 최저가 입찰제도가 중소기업에 불리하다고 밝혔다. 경쟁이 치열한 업종의 경우는 난립한 경쟁업체들이 대기업의 수주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제품가격을 낮춰 입찰에 참가, 서로 손해를 보고 있다. 일본은 적정가 입찰이라고 해서 이윤이 보장되는 가격선에서 최소가격을 제시한 업체에 낙찰된다. 이와 비교하면 국내 대부분 입찰에서 시행되는 최저입찰제는 대기업에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갑의 횡포에 숙달된 회사 경영자들은 역으로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서울 삼성동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P사장은 요즘 대기업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준비중이다. 본인도 몇 번 사기를 당한 적이 있지만 아직 한 번도 누구를 상대로 사기를 친 적은 없다.노련한 사업가는 상대 배려할 줄 알아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그림으로 그럴듯하게 상대를 속일 생각이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대기업 실무자들이 자신이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빼돌려 마치 그들이 구상한 것처럼 이용하는 사례를 많이 경험했다. P사장은 이제 대기업 직원들을 만나면 으레 대규모의 청사진을 들고 간다. 그림이 크면 파트너십을 맺자고 제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이것도 사기라고 볼 수 있습니까. 제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워낙 상대는 돈과 힘을 막강하게 갖추고 있어서 얕잡아 보이면 당하기 십상입니다.”사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밸런스(Balance)’라는 말이 있다. 계약 당시엔 몰라도 얼마 지난 뒤 약자가 자신이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하면 언제든 복수할 것이고, 그러면 강자 역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련한 사업가는 자신의 이익을 줄이더라도 상대를 배려한다.해외사례일본의 대기업·중소기업 계약관행잇속 챙기는 동상이몽보다 상호협력 ‘동병상련’일본의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거래하기 위해 ‘구좌’를 튼다. 구좌는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지속적으로 거래하기 위해 협력계약을 맺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일본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컨대 특정 대기업의 구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다. 관계로 금융신용을 창조하기 때문에 갑과 을은 서로를 선택할 때 신중하게 파악한 뒤 구좌를 개설한다.국내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는 있다. 그러나 갑과 을의 종속적인 관계와 비교하면 상당히 다르다. 일본의 갑은 을의 경영안정을 위해 물적으로 혹은 인적으로 다양하게 지원한다. 경영지도를 위해 ‘출향’이라는 제도를 이용, 을의 회사에 갑의 인재를 파견한다거나 협력회사의 품질향상을 위해 직원의 교육기회 등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서로간에 장기적으로 지원하고 배려할 수 있는 관계로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은 한 순간의 필요로 만들어지는 관계가 아닌가.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하면서 부러움을 느낀 것은 일본의 계약관행이다. 우리 회사의 주력사업인 시스템통합(SI)부분의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SI비즈니스는 건축업과 비슷하다. 설계자(시스템 설계)와 시공자(프로그램 개발)가 다르다.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려는 회사는 설계단계의 계약에 응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스템설계자는 정해진 기간과 비용으로 고객을 중심으로 최선을 다해 설계를 하고, 프로그램 개발자 역시 설계자가 제시한 설계도에 따라 타당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설계변경의 요구가 있을 때면 을은 갑에게 설계변경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갑의 동의를 받는다. 이럴 경우 사양변경 및 시공변경은 모두 추가로 갑이 을에게 지불해야 한다.그러나 한국의 관행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을은 갑이 제시한 제안요청서를 근거로 포괄적인 제안을 하고 계약한다. 계약당시 제품의 정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강행한다. 서로 희망사항만 주고받은 꼴이다. 즉 집을 짓는데 설계도가 아닌 조감도만 제시하고 견적을 받고 계약을 하는 것이다. 결국 계약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갑과 을은 동병상련의 관계가 아니라 동상이몽의 관계가 된다. 갑은 을에게 최대한 많은 부분의 일을 수행시키려고 하고 을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일만 하려고 한다. 일본의 기술자들이 고객의 요구에 맞추려고 서로 노력하는 모습과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일본의 정부 및 공기업은 기업들에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각 대형 SI업체들이 전자정부관련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덤핑 수주한 경우가 있었다. 일본의 대형 SI업체인 H사가 정부프로젝트에 1엔을 제시해 낙찰받았다. 반면 경쟁사는 1억엔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일본의 법으로도 제재할 수 없다. 결국 이런 관행이 있다는 것은 정부와 공기업이 합리적으로 비용산정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되므로 이를 부당한 요구로 간주할 수 있다.특히 일본은 한국보다도 인맥이 중시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당한 관행은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그러나 10년 동안 일본에서 사업한 내 경험으로 보면 한국보다는 부당거래가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