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래방기기 ‘질러넷’으로 재도약

평소 잘 불렀던 노래도 술만 마시면 떠오르지 않아 가슴만 치고 앉아 있던 김대리. 그는 오늘 부서 회식을 앞두고 휴대폰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평소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 세 곡을 찾아 어딘가로 송신한다. 술 한잔 걸친 김대리는 동료들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노래방으로 향하고, 노래방기기에 다가선 김대리는 자신있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한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동료들은 노래방기기에 김대리가 좋아하는 노래 세 곡이 예약곡으로 뜨자 그제서야 ‘김대리 최고’라는 환호성을 내지른다. 이 세 곡은 김대리가 회식 참석 전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송신한 바로 그 노래였던 것.먼 미래의 가상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오는 6월께 이런 노래방기기가 서울 신촌에 처음으로 설치될 예정이다. 이 기기는 기존 아날로그식보다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일명 ‘디지털 노래방기기’인 셈이다. 이를 개발한 회사는 태진미디어.“1997년 이후 인터넷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노래방 업주들이 많은 피해를 봤습니다. 노래방을 찾은 사람들이 PC방으로 발걸음을 바꾼 것이죠. 때문에 PC방으로 전환하는 노래방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6월께 신촌 노래방에 첫선윤재환 사장은 살아남기 위해 해결책을 찾아나섰다. 그리곤 생각해낸 게 ‘노래방기기에 인터넷 개념을 도입해 보자’는 것. 이 아이디어는 ‘질러넷(Ziller-Net)’이라는 노래방기기로 형상화됐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과 PC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미리 선곡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신곡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보름 단위로 사람이 직접 와 15곡 정도의 신곡을 업데이트시켰던 기존 노래방기기와 달리 한 달에 최대 110곡을 인터넷을 통해 업데이트할 수 있게 했다.이에 따라 태진미디어는 올 매출이 지난해(195억원)보다 두 배이상 늘어난 56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순이익도 지난해(10억원)보다 열 배쯤 늘어난 1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자신한다. 윤사장은 “지난해는 노래방 저작권 분쟁으로 3개월 이상 영업을 하지 못해 매출이 저조했다”며 “올해는 일본 수출(150억원)과 함께 질러넷 등 신제품에 대기 수요가 많아 매출 달성은 무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 대리점 65곳에서 신제품이 나오기만 하면 구매하기로 한 곳이 대부분이어서 매출은 바로 일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태진미디어는 1989년 국내 노래방기기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노래반주기를 처음 만든 회사다. 1981년 설립 당시엔 태진음향이란 이름으로 자동차 오디오 스피커 등 액세서리를 생산 판매했다. 그러다 1986년 사업아이템을 바꿨고 3년 뒤 컴퓨터 노래반주기를 출시하면서 노래방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회사이름을 태진미디어로 바꾼 시기는 지난 1991년.태진미디어는 1990년대 들어 노래방이 크게 늘면서 가파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태진미디어를 비롯 금영, 앗싸(ASSA), 엘프 등 노래방기기 전문 업체 10여곳은 공급이 딸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윤사장은 “당시 노래방 숫자가 2만 5,000곳에 이르면서 노래방기기 시장규모가 몇천억 원대에 달했다”며 “전성기였던 1993년에 우리는 월 평균 3,000~4,000대씩 팔아 전체 시장의 50% 정도를 점유하기도 했다”고 전했다.이처럼 잘나가던 노래방기기 시장도 1997년에 접어들면서 시들해졌다. 초고속망 인터넷으로 무장한 PC방들이 속속 생기면서 노래방의 입지를 좁혀왔기 때문. 여기에 1997년 말 강타한 IMF 관리체제가 국내 산업계를 뒤집어놓으면서 노래방 기기 시장도 일대 변혁을 맞았다. 경기악화로 노래방을 찾는 고객이 줄어들자 수익이 떨어진 업자들이 하나 둘씩 PC방으로 전업했다. 이런 와중에 대영과 엘프가 연쇄 부도에 휘말려 도산했고, 앗싸는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이뿐 아니라 대리점 등 유통시장도 부도 도미노에 휩쓸렸다.그럼에도 태진미디어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1997년 4월 코스닥시장에 등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또 태진미디어와 거래했던 당시 대리점들도 IMF 타격을 입지 않았다.현금위주 경영으로 IMF때 위기 넘겨여기엔 태진미디어만의 독특한 경영원칙이 있어 가능했다. 설립초기부터 철저하게 선입금 후매출 경영을 고수해 왔던 것이다.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어음을 주고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미수금이 거의 없고 1996년부터 최근까지 무차입 경영 등으로 재무구조를 튼튼하게 꾸려나가 IMF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태진미디어는 지난해 노래방기기 관련 아이템을 일본에 수출하면서 해외진출의 물꼬를 텄다. 일본 노래반주기 시장 1위 업체인 다이치코쇼에 올해 말까지 리모콘 노래반주기 인덱스기를 1,200만달러(약 150억원)어치를 공급키로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는 노래방 시장의 본산인 일본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단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태진미디어는 일본 수출에 이어 중국시장에 진출, 노래방 시장을 선점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디지털 노래방기기 개발을 통해 온라인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태진미디어는 이란 잡지를 출판하는 등 음악콘텐츠 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Interview 윤재환 사장“IT기술 이용한 차별화 제품으로 승부”윤재환 사장(48)은 1986년 우연히 일본 잡지를 보다가 노래방 기기 사업 힌트를 얻었다. 음원을 심은 컴퓨터 칩이 개발됐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뭔가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컴퓨터 칩을 이용해 노래반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무(歌舞)하면 빠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1986년부터 사업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사업 착수 3년 만인 1989년에 윤사장은 국내 최초의 컴퓨터 노래반주기를 완성했다. 지금 보면 조잡한 제품이었지만 당시 세인의 관심을 모으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노래반주기 사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볼 무렵인 1991년 5월에 윤사장에게 새로운 사업기회가 찾아왔다. 부산 로얄전자 사장이 찾아와 자신이 개발한 자막기와 태진미디어의 반주기를 결합해 새로운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윤사장은 로얄전자를 미심쩍게 생각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태진미디어에게 퇴짜를 맞은 로얄전자는 당시 노래반주기를 개발하고 있던 앗싸에 접근해 제휴를 맺었다. 앗싸는 로얄전자와 자막이 나오는 노래반주기를 개발하고 부산에 국내 처음으로 노래방을 열어 노래방 돌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도 노래방기기 하면 앗싸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다.윤사장은 “그때 로얄전자와 손을 잡았다면 노래방 사업에 일찍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면서도 “하지만 늦게 출발했어도 차별화된 제품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노래방과 함께 20년 가까이 사업을 해온 윤사장은 이제 노래방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터넷 초고속망 등 새로운 기술과의 접목이 없이는 기존의 아날로그 노래방은 경쟁력이 더 이상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디지털 노래방 기기다. 하지만 디지털 노래방 기기가 큰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렇지만 윤사장은 “2002년은 IT를 이용한 네트워크 노래방 기기로 재도약해 제 2창업을 이룰 것”이라며 자신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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