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쇠고기 원산지 바꿔치기 ‘존폐기로’

“고객들이 우리 회사를 유키지루시 그룹 전체나 마찬가지로 생각해 주시기 때문에 지난번 사건의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무슨 말로 사과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머리 숙여 잘못을 빌 뿐입니다.”지난 1월 22일 도쿄 니혼바시에 자리잡은 유키지루시식품의 본사 회의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침통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선 요시다 마스조 유키지루시식품 사장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용서만을 바란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요시다 사장이 고위 임원들과 함께 서둘러 기자회견에 나서게 된 것은 이날 아침 에 유키지루시식품의 소비자 기만을 고발하는 기사가 1면 톱 뉴스로 등장했기 때문.은 다른 매스컴들을 따돌리고 낚은 특종 기사에서 유키지루시식품이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보관 중인 호주산 수입쇠고기를 일본산으로 포장을 바꿔치기 했다고 고발했다. 기사가 일본 열도에 던진 충격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신문, 방송은 너나 할 것 없이 유키지루시식품 사건을 뉴스 첫머리에 올리면서 부도덕한 회사라며 연일 회초리를 들이댔다. 소비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슈퍼마켓, 편의점 등 유통업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유키지루시식품의 제품을 매장에서 몰아냈다. 감독 관청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비난에 몰린 농림수산성은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됐다며 눈에 불을 켜고 진상 조사에 달려들었다. 보조금 몇 푼에 이성을 잃고 부정을 저질렀던 유키지루시로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존폐의 기로에 몰린 셈이 됐다.사건 파문은 농림수산성이 유키지루시의 쇠고기 판매를 사실상 중지시키는 철퇴를 내리고 요시다 사장이 내부 수습과 인책 사임의 뜻을 밝힌 약 일주일 뒤부터야 간신히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다.그러나 일본 언론은 사건의 장본인이 과거 식중독 사건 은폐 기도로 혼쭐이 난 유키지루시유업의 계열사라는 점, 그리고 의도적으로 정부와 소비자들을 속이려 한 악질 수법이 동원됐다는 점 등을 들어 단순한 사고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눈(雪)의 결정체를 형상화한 브랜드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유키지루시유업은 일본 최대의 유가공업체로, 지난 2000년 6월까지만 해도 일본 소비자들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부실한 위생 관리로 초대형 집단식중독 사건을 일으킨 데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은폐와 허위 보고를 일삼았던 것이 들통나면서 같은해 7월 창립 후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최고경영진 사임과 관련자 다수 구속의 홍역을 겪은 유키지루시유업은 ‘믿지 못할 회사’라는 낙인이 찍힌 후 지금도 당시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의 특종 보도로 밝혀져매출이 곤두박질치고 회사가 제 기력을 찾지 못하자 직장을 등지는 종업원들이 속출, 사건 전 6,400여명에 이르렀던 인원이 지금은 약 4,000명으로 줄었다. 2000년 3월 결산에서 2억엔의 흑자를 냈던 영업실적은 2001년 3월 38억엔의 적자로 추락한 데 이어, 올해도 26억엔의 적자가 불가피한 상태다. 금융시장에서의 평가 또한 여전히 싸늘하다.일본 신용평가회사들이 유키지루시유업 사채에 매겨놓은 평점은 ‘트리플B’ 등급으로 투자부적격이다. 한술 더 떠 미국의 S&P는 이번 사건이 터지자 마자 지난 1월 24일 유키지루시의 장기 신용등급을 ‘BBpi’에서 ‘B+pi’로 재빠르게 강등시켰다.자금시장 관계자들은 2001년 9월말 현재 1,720억엔의 유이자부채를 안고 있는 유키지루시유업이 계열사의 사기사건으로 자금 조달에 더 애를 먹게 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유키지루시유업 사건이 하급 직원들의 잘못 은폐와 내부 언로 차단 때문에 더 크게 번져나갔던 것과 달리, 식품은 회사측이 정부와 소비자들을 속였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유키지루시식품 사건은 1차적으로 지난해 여름부터 일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광우병과 관련이 있다. 일본 정부가 광우병 감염 여부 검사 전에 도축된 쇠고기를 국비로 모두 사들이고, 이를 소각하는 작업에 들어가자 일부 간부들이 재고도 줄이고, 나랏돈을 좀더 타내기 위해 잔꾀를 부린 것이 핵심이다.유키지루시식품의 칸사이 식육센터는 지난해 10월말 호주산 수입쇠고기를 위탁 보관해 왔던 효고현 니시노미야 냉장에 포장을 일본산으로 바꿔치도록 의뢰한 후 직원들을 파견해 작업을 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센터가 일본산으로 포장을 속인 것은 모두 13.8t에 달했으며, 이 수법으로 사건 전까지 일본 정부의 돈 900만엔을 받아냈다.지난해 광우병 파동 때도 ‘모럴 해저드’일본 정부는 쇠고기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냉동육의 경우 외국산은 kg당 382~485엔, 일본산은 1,554엔을 지급하기로 방침을 세웠다.말하자면 칸사이 식육센터는 광우병 파동으로 쇠고기 재고가 눈덩이처럼 늘어나자 일본 정부가 수매작업에 들어간 틈을 타 재고도 처분하고 돈도 더 챙길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칸사이 식육센터의 조작은 도쿄 본사에서도 사건 직후 내부 제보를 통해 정황을 짐작했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하지만 현지출장을 나온 실무진이 명확한 단서를 잡지 못해 그냥 지나친 바람에 사건을 이처럼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지난 1950년에 창립돼 유키지루시유업이 65%의 지분을 갖고 있는 유키지루시식품은 매출이 2000년의 경우 94억엔에 불과, 일본 식품업계에서는 중·소형급에 속하는 회사다. 식육과 소매를 병행하지만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밖에 되지 않고 주력은 햄, 소시지 등 육가공품과 일반 가공식품에 의존하고 있다.하지만 식육에서의 사기, 조작사건이 치명타를 날리면서 다른 제품의 판매는 물론 존립 자체에도 위협을 안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신뢰와 신용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일본 상문화 풍토에서 유키지루시유업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식품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일으킴에 따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됐다는 것이다.유키지루시식품은 사건 직후 비난 여론이 들끓으면서 공장 가동률이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급락했다. 주식시장에서는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팔자’로 돌아서면서 주가가 지난 1월 25일 하루 동안 전일대비 10%나 빠지며 65엔까지 밀려나기도 했다.일본언론은 유키지루시식품의 사건을 ‘도덕불감증’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고 앞으로의 사태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모기업이 창립 후 최대 시련을 겪은 지 불과 1년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사건이 터질 수 있냐며, 이는 전적으로 도덕과 직업윤리를 외면한 결과라는 분석이다.일부 전문가들은 기업 내용과 품질에 관계없이 막연하게 브랜드 중심으로 기업을 편 갈랐던 소비자들의 비합리적 온정주의가 도덕적 불감증을 키웠다고 비판하고 있다. yangsd@ 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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