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할머니 “손주가 좋아! 좋아!”

미국 일리노이주 파크리지에 사는 패트 달젤 부인(51)은 얼마 전 ‘출산’을 앞두고 직장동료들에게서 선물을 한아름 받았다. 기저귀에서 갓난아기용 턱받이, 잠옷 등 갖가지 유아용품들이었다. 달젤 부인은 더없이 즐거워했다. 하지만 ‘출산’은 달젤부인의 몫이 아니었다. 그의 며느리가 출산예정이었고 달젤 부인은 손자를 키울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나는 할머니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장만해 놓고 싶었다”는 게 달젤 부인의 얘기다.요즘 미국 사회에선 전후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서 조부모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손자 손녀들을 직접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조부모의 육아와 관련된 시장이 미국에서만 연간 무려 300억달러(우리 돈으로 약 40조원)에 이르며, 그 시장의 성장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산이다.실제 육아용품 판매상들은 어린이용품을 사는 사람의 3분의 1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라고 말한다. 이는 5년 전에 비해 20~30% 늘어난 수준. 조부모와 손자들이 함께 하는 여행상품이 급증하는 등 이들을 위한 이벤트나 상품이 개발되고 있다.조부모들의 육아에 대한 관심 증대는 여러 이유로 해석된다. 먼저 ‘수급불균형’. 약 2억 5,000만 인구의 미국에는 지금 6,900만명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지만 가족당 아이를 낳는 비율은 30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손자들 보기가 힘들어진 만큼 애정이 커지는 것은 인지상정인 셈이다. 이혼율 증가도 한 원인. 부모가 이혼하면서 자식들의 양육을 조부모에게 부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모든 일에 적극적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도 손자들 양육에 한몫하고 있다.텍사스 댈러스에 사는 경영컨설턴트인 데니스 디아미코씨(60) 부부는 며느리가 임신했을 때부터 아들 부부와 함께 유아교육을 받았으며 손자가 3개월됐을 때 이웃 70명을 초대해 거대한 축하행사를 갖기도 했다. 손자 둘을 돌보는 오하이오주의 파멜라 라이스한 할머니는 개인 홈페이지(www.happygrandparent. com)를 만들어 육아경험을 자료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이웃이나 직장동료말고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고 말한다.이처럼 요즘 할아버지 할머니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들의 새로운 취향이 미국 가정들을 한 세대 전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다. 미국 가정들은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가까이 살았고 조부모들이 거의 모든 것을 도왔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동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는 휴일에 찾아오거나 생일카드에 수표를 넣어 보내주는 다소 생소한 사이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난 90년대 10년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베이비붐 세대 조부모들은 손자들을 위해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을 어느 때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어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손주와 함께하는 프로그램 다양에 사는 캐롤라인 해커부인은(63) 외손자의 옷 장만은 물론 교회 선택, 식탁 예절까지 모든 것을 관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니는 직장을 잠시 중단하고 지역 종교단체에서 주관하는 ‘기저귀에서 딜레마까지’라는 제목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한 강의를 신청했다. 이 강의는 손자는 물론 신세대인 딸과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도 가르쳐준다. 신세대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많이 배운 해커 부인은 “딸과 충돌하지 않고 손자를 키우는 방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이같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열의는 관련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유아용품을 파는 소매상뿐 아니라 관련 서적 출판에서부터 야외캠프까지 다양하다. 일부 캠프에서는 조부모와 손자들이 함께 카누나 하이킹을 하고 썰매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세대간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마련해 주고 있다.조부모와의 여행을 특화한 그랜드트래블(Grandtravel)이란 한 여행사는 지난 96년 이후 매출이 60% 늘어났다. 이 회사 설립자인 헬레나 코니그씨는 “조부모들은 손자들에게 추억을 심어주고 싶어한다”며 “이를 위한 돈이라면 그렇게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 일부 상품은 열흘간 손자들과 함께 보내는 데 최고 8,000달러(약 1,000만원)까지 내기도 한다.기업들도 이런 시장을 놓치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직접적인 마케팅이 늘어난다. 테네시주 멤피스의 어린이용 부티크 리틀 램&아이비(LittleLambs &Ivy)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날’을 만들어 이날에는 20% 할인해 주고 있다. 앞으로 더많은 할인을 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밤’을 계획하고 있다. 노인 관련 연구기관인 AARP에 따르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자들을 위해 지출하는 금액은 1인당 연 490달러로 이를 합산하면 전체 연 300억달러에 이르는 규모이다.병원들도 마케팅 차원에서 이런 추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 있는 그리니치 병원은 ‘조부모들의 양육’이란 강의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자동차 안전띠를 채워주는 방법은 물론 기저귀 가는 요령, 우유 먹이기, 낮잠 재우기, 골고루 영양섭취 하는 방법 등에 대해 가르친다. 미국 전역에는 이런 강의가 몇백 개에 달할 정도이다.임신한 며느리를 위해 그리니치 병원에서 교육을 받는 수잔 멜리스 부인(58)은 “나는 절대로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며 딸의 아이들을 키웠을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몇 해 전 외손자들을 돌봤을 때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딸과 사위에게 “할머니가 과자를 너무 많이 주고 TV를 너무 많이 보게 만들었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미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점점 커가는 손자 사랑은 조만간 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면서 관련시장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dongin@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