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소설가문화방송의 드라마 ‘상도’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원작 역시 출간 1년 만에 25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면서 ‘상도’는 요즘 작가 최인호에게 ‘호’처럼 따라 다닌다.가 전국의 서점과 안방을 모두 장악하는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최작가에겐 판매 부수나 시청률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도 내세울 만한 거상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오랜 목마름에 한 줄기 신선한 샘물이 됐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작품 어디에도 ‘돈 버는 방법’은 없습니다. 상도는 ‘상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죠. 만약 그런 대목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넘게 책이 팔렸을지도 모르죠. 상도의 표상이 될 만한 거상의 ‘돈 쓰는 방법’을 담고 싶었을 뿐입니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떠오른 화두는 다름 아닌 주인공 임상옥이 현재의 어떤 기업가를 모델로 했느냐는 것이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다는 대우의 김우중 전 회장일 것이란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임상옥이 국내에 치중했던 송상과 달리 해외 시장을 개척한 만상의 도방이었다는 점도 김 전회장의 수출 드라이브와 무관하지 않다.더구나 대우 사태의 책임을 CEO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공동책임론’을 편 그의 발언은 이런 설에 신빙성을 더했다. 한편에선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김기섭 회장이 자동차 광이란 점을 들어 삼성 이건희 회장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김우중씨 변호인 오해 받기도그 역시 만나는 이들마다 ‘임상옥이 누구’인지를 해명해 달라는 강요 아닌 강요에 시달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 속 임상옥은 200년 전 실재했던 의주 거상 임상옥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허구의 인물’일 뿐이란 게 그의 답이다.“제가 마치 김우중 전회장의 변호인처럼 돼버린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임상옥이 김 전회장이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죠. 소설과 실제를 연결시키는 것이 흥미로운 건 사실이죠.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역시 제가 주목한 거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친구들 가운데도 경영인들이 여럿이에요. 제가 아는 모든 경영인의 캐릭터를 참고한 것만은 맞습니다.”어느 누구도 아니지만, 모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그러나 경제전문가 못지않은 그의 날카로운 비판 속엔 꼭 누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추측을 가능케 하는 모델이 잡힌다.그는 ‘인삼소각’ 편과 ‘홍경래’ 편에서 현재의 병폐가 무엇인지를 꼬집고 싶었다고 밝혔다. 만상의 인삼 수출을 차단하려는 중국상인들의 불매동맹에 맞서 인삼을 모두 불사르겠다는 임상옥의 과감한 결단은 그가 추천하는 의 백미다. 수출장벽이 높아 재고가 쌓이면 값을 낮춰 덤핑으로 눈앞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지만, 일등상품의 브랜드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만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그간 기업들은 한 가지 사업만으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리스크관리 차원에서 이 사업이 아니면 다른 사업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문어발식 확장을 했던 거죠. 임상옥은 달랐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신념으로 조선인삼의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했던 거죠.”그는 교통사고로 이(齒) 하나를 다친 후 얼마 못가 이 전체가 상해 버린 자신의 경험까지 예로 들어 무리한 계열사 확장으로 연쇄부도의 비운을 맞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했다.“맥아더 장군이 밖으로 팽창만 하던 일본의 허가 바로 내부에 있었음을 간파하고 본토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 일본 패망을 앞당겼죠. 이처럼 내실 없는 세계화는 어불성설입니다. 천하 없는 ‘세계 경영’이라고 해도 탄탄한 국내 기반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는 걸 우리 모두가 확인하지 않았습니까.”목숨을 걸고 홍경래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친 대목 또한 ‘장사꾼은 장사만 해야 한다’는 상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백성 편에 섰다는 홍경래 또한 임상옥의 눈에는 정치세력에 지나지 않았고 정치는 어차피 갈 길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임상옥의 입을 빌어 ‘솥의 삼족지세’로 돈, 권력, 명예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와 같이 할 수 없다는 이치를 설파했던 것도 이를 몰랐던 한 경제인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인이 정치에 뛰어들어 이런 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리 모두 목도했다고 그는 말한다. 고 정 명예회장의 경우 상인의 길만을 걸었어야 했다는 간접적인 암시다.“그동안 우리 경제를 갉아먹어왔던 정경유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기업가의 모습을 작품 속에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경제 5단체가 투명하지 않은 정치자금을 주지 않기로 천명한 것은 임상옥이 걸었던 상도에 한 걸음 다가간 통쾌한 소식이었습니다.”임상옥이 대우 김 전회장을 모델로 했건, 고 정 명예회장에서 모티브를 얻었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기대했던 우리 시대의 거상에서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를 소설 속에서나마 완성시키려 한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그 자신이 지난 70년대를 풍미했던 청년문화의 주역인 만큼 당시 한국의 고속성장을 이끌어낸 경영인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애정 뒤엔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큰 게 사실이다. 10년 동안 시대를 거슬러 임상옥이란 인물을 되살려낸 것도 그런 고민에서 시작됐다.결국 임상옥은 아직은 미완인 우리 시대 기업가의 자화상을 작품 속에서 완성시킨 ‘이상적인 CEO’인 셈이다. 다시 말해 그가에서 보여준 상상력은 지금의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병의 치유책에서 출발한 것이다.장보고 후엔 ‘인간’ 예수 집필 계획상도는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란 극중 메시지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그는 말한다.“현재의 노사문제만 보더라도 상도를 모르는 경영자가 어떻게 직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가진 자들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꿈꾸던 상도가 언젠가는 우리 시대에도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확신했다.현재 연재 중인 소설 역시 그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200년 전 한국경제를 맛본 그는 다시 거기서 800년을 더 거슬러 또 한 명의 거상 장보고를 만나러 길을 떠난 것이다.“임상옥이 인삼으로 중국시장을 주름잡았다면 장보고는 도자기로 다국적 기업을 건설한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죠.”장보고 후엔 ‘인간 예수’의 일대기를 찾는 여정을 떠날 생각이라고 한다.그는 집필 기간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임상옥의 유언이다.“재물의 화신인 임상옥이었지만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을 정도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어차피 자기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그 역시 인세의 일부를 사회에 되돌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도 ‘상도’를 실천한다는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