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운용기관 찾아 “돈 돌고돈다”

도쿄 인근의 치바현에 살고 있는 아오키 도미코 노인(여, 75)은 결혼 후 분가해 살고 있는 딸과 최근 언성을 높여가며 한동안 다퉈야 했다. 모녀지간을 볼썽사나운 싸움에 휘말리게 만든 것은 우체국에서 딸의 집으로 보낸 한 장의 경고통지서였다.‘손님은 예치한도를 넘겨 돈을 맡기고 있으니 초과분에 상당하는 예금을 해약하거나 인출해 가시기 바랍니다.’우체국이 정한 한도(1인당 1,000만엔)를 넘긴 일이 없는 딸은 깜짝 놀랐다. 분명 자신의 이름으로 또 다른 구좌가 개설된 데다 이 구좌에 900만엔이 입금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아들 앞으로도 새 통장이 발급됐고, 출처를 알 수 없는 800만엔의 거금이 들어와 있었다.소스라치게 놀란 딸은 주위를 수소문해본 결과 자신의 명의가 도용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범인은 뜻밖에도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였다. “내가 죽기 전에 네게 미리 주는 셈치고 통장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딸의 명의로 몰래 통장을 만들었다 들통난 아오키 노인은 ‘변명 반 해명 반’으로 딸을 설득하려 했지만 화가 난 딸의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신의 권리를 빼앗아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딸의 불만이었다.아오키 노인이 딸과 벌인 설전은 한국인들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싸움의 불씨가 된 우체국의 경고통지서부터가 그렇다. 1인당 예치한도를 1,000만엔으로 정해 놓고 이를 넘긴 고객들에게는 돈을 찾아가라는 우체국의 업무 방식이 우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자신의 통장에 어머니가 돈을 넣어놓은 바람에 한도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됐다고 볼멘 소리를 퍼부은 딸의 항의도 어찌 보면 한국과 사정이 다르다.하지만 아오키 모녀의 불화와 다툼은 분명 사실이다. 페이 오프(Pay Off) 동결 해제를 20여일 앞둔 2002년 3월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해프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금융시장에서 최근 최고의 화두가 되고 있는 페이 오프는 한국 현실에 빗대 말한다면 예금자 보호장치다.예금자 보호법에 따라 71년 도입된 이 장치는 금융기관이 무너져 고객들이 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게 될 경우 일본 정부가 원금 1,000만엔과 그 이자까지 보장한다는 제도다.그러나 1,000만엔 이상을 맡기고 있는 큰손 예금주들에게는 오히려 걱정 대상이다. 기껏해야 보장 한도가 1,000만엔 남짓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페이 오프는 도입 후 한 번도 발동된 사례가 없지만 지난 95년 8월 신용조합과 신용금고 등 소형 금융기관의 파탄이 줄을 잇자 동결조치가 떨어졌다. 그러던 것이 오는 4월 1일부터 동결이 해제돼 법이 정한 제도로서의 본래 기능을 찾게 됐다.소액 예금주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지만 그동안 동결돼왔던 페이 오프 제도가 풀린다는 것은 많은 일본 국민들에게 공포나 마찬가지다. 가구당 평균 저축액이 2000년말 현재 1,448만엔에 이를 정도로 대다수 성인이 1,000만엔 이상의 여유 돈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1,000만엔까지만 보호해 준다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금융기관을 고르라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아오키 노인이 딸과 손자의 명의를 도용해서까지 우체국에 예금을 분산시킨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지금까지 집 근처의 신용금고를 아무 탈 없이 이용해 왔지만 언제 문닫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행정기관인 우체국으로 발길을 옮기게 만든 것이다.페이 오프 동결 해제를 앞두고 불거진 대표적 현상의 하나로는 현금 유통량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금 수요가 급증한 것과 동시에 주택 등 돈을 묻어둘 만한 대체 투자수단이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변화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지자체, 주택관리조합 등 거액의 공금을 굴리는 단체들이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떠는 광경도 심심찮게 매스컴을 타고 있다.현금 유통량 현재 지난해보다 12.4% 급증일본 은행은 시중에 돌아다니는 현찰이 2월 들어 대폭 늘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2월말 현재 지난해 같은달보다 12.4%나 많은 63조 3,000억엔의 현찰이 풀려 있다는 것이다. 일본 은행은 또 현금에다 보통예금 등 요구불예금을 합친 M1의 2월 중 평균잔액이 277조 5,000억엔으로 전년 동월에 비해 무려 19.4%나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증가폭은 73년 11월의 21.2%에 이어 28년 만에 20% 선에 육박한 것이며, 무엇보다 페이 오프 동결 해제를 앞둔 자금시장 동요와 관련이 있다고 일본 은행은 해석하고 있다.술렁이는 금융시장은 지자체들까지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공금보호’에 목을 걸 수밖에 없는 지자체들은 안전한 자금 피신처를 찾느라 금융기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니가타현은 회계부서에 최근 기발한 지시를 내렸다. ‘중앙정부가 정한 금융기관의 최저 자기자본비율(BIS)은 4%지만 6% 이상의 금융기관만 거래해라.’‘자기자본비율이 요건을 충족시킨다 해도 주가가 액면가의 4배 이상 되지 않으면 거래대상에서 제외시켜라’는 등의 내용이었다.간토 지방에 본부를 둔 지방공무원공제조합은 최근 안전한 자금운용처를 찾기 위해 고이자 유혹을 뿌리쳤다. 3개월 예치에 연간 0.4%의 이자를 주겠다는 금융기관이 나타났지만 이를 마다하고 0.1%밖에 주지 않는 대형 은행을 택했다. 이자 몇 푼 더 받으려다 공금을 날리기라도 하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이 작용했음은 물론이었다.금융기관에서 나온 돈이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몰려가는 현상도 열기를 더해 가고 있다. 도쿄 치요다구에 본점을 둔 귀금속상 ‘도쿠료쿠’에서는 금 판매량이 지난 1월의 경우 지난해 같은달에 비해 5배, 2월은 무려 9배가 늘었다. 일본인들의 금 사재기 열풍은 구매패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이 회사의 야마모토 후미오 지금부장은 “1인당 구매량이 종전보다 2∼3배씩 늘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신규고객이 특히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1kg에 144만엔씩 하는 판자 모양의 지금을 한번에 5kg, 10kg씩 주문하는 고객이 수두룩하다고 귀띔하고 있다. 긴자의 대형업체 다나카 귀금속에서는 금화 500매가 들어 있는 약 27kg짜리 상자(약 2,000만엔)를 2001년 12월 한정품으로 준비해 놓았으나 열흘 만에 모두 팔려나갔다.금융기관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은 관심 사각지대나 다름없던 주택시장에도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도쿄 긴자에서 올해초 분양한 25층짜리의 초고층맨션 긴자 타워는 당초 매기가 없을 것으로 걱정했으나 3,000만엔 전후의 소형 평수를 중심으로 일찌감치 동나버렸다. 4월 이후의 금융시장 전망과 관련, 야나기사와 하쿠오 일본 금융상은 “건강한 금융기관만이 살아남게 돼 건전성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판단이 너무 안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리차드 쿠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1,400조엔 규모의 개인 금융자산에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며 “일본 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페이 오프 동결 해제는 치명타를 안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yangsd @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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