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이 웬말', 단기 부채부터 갚아라

직장생활 4년 차인 이민교씨(31)는 최근 이사를 했다. 그는 3년 전 결혼을 하면서 13평짜리 아담한 전셋집(3,200만원)에서 단촐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좀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그가 결정적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올해 세 살이 되는 딸아이가 집안에서 놀다가 크게 다쳤을 때. 비좁은 집에서 가구에 부딪혀 상처를 입은 딸을 보고는 당장 마음껏 놀 수 있는 넓은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경기도 신도시 부근에 33평짜리 아파트를 전세 7,000만원을 주고 구했다. 3,000만원은 은행에서 전세보증금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넓은 집에서 좋아하는 딸아이와 아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기분까지 넉넉해진 이민교씨. 그러나 당장 이사 후 첫 월급날이 돌아오면서부터 아내와 실랑이가 시작됐다. 자동차 할부금, 전세자금 대출이자 등을 챙기던 아내가 “뭘 먹고 사느냐”며 투덜거린 것. “괜찮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돌아서서 생각하니 내심 고민이 된다.그는 전세자금 대출 3,000만원, 마이너스 통장에 1,600만원, 계속 납부해야 할 자동차 할부금 700만원 등의 부채를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들어뒀던 각종 적금은 모두 해약해서 부족한 전세 자금과 이사비용을 마련하는 데 썼다. 저축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임은 물론이고, 당장 비상 사태라도 생길 경우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다.얼마나 지나면 부채를 모두 정리할 수 있을까. 지난 1월 연봉도 약간 인상돼 이번달부터는 그럭저럭 여유도 생길 것 같다. 일단 약간의 저축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현재 예상으로는 월 50만∼70만원의 저축 여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연봉 3,000만원이 넘는 그로서는 세금 혜택이 있는 근로자우대로 가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어떤 상품에 가입해 저축을 하는 게 좋을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예전에 가입했던 것은 전세금을 마련하면서 이미 해약했다.) 막연한 생각들을 갖고 있던 그는 은행 PB(프라이빗 뱅커)의 도움을 청했다.세금 혜택 없는 소비자 부채 경계하나은행 임동하 PB는 이민교씨의 자산과 부채 현황을 먼저 검토했다. 우선 그의 현황을 분석해 보면, 이씨의 총자산 대비 순자산 비율이 50%에도 못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채비율은 182%. 부채의 내용 중에서도 소비자부채가 50% 가까이 된다(총부채 5,500만원 중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카드 미결제액, 자동차 할부금을 더한 2,500만원).소비자부채란 전세금과 같이 꼭 필요한 자금이 아닌 소비성 지출에 사용한 금액을 말하는데, 이는 소득공제나 절세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빚이다. 자산관리 전문가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화로운 운용비율은 “빚은 순자산의 30% 이상, 대출상환액은 원금과 이자 합해 연간 소득의 30%”다. 그러나 이씨는 이미 이런 적정비율을 넘어서 있는 상태다.임동하 PB는 이씨의 경우를 두고 “아무런 기반이 없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재무 구조”라고 말했다. 그리고 금융자산(즉 주식이나 신탁, 채권 등으로 운용하는 투자자산)의 비중이 낮기 때문에 앞으로 재산이 늘어날 가능성도 낮은 구조다.우선 이씨가 갖고 있는 시급한 문제는 비상 예비 자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수입과 생활비 등을 고려해 필요 비상예비자금을 산출하면 3개월 대비 자금은 960만원, 6개월 기준으로 하면 1,920만원이 필요하다. 우선 이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유동부채 먼저, 고정부채 그 다음에그리고 나서 부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원칙과 전략을 세워야 한다. 임PB가 얘기하는 첫 번째 충고는 여유가 생기더라도 저축을 하지 말고 가능한 빚부터 갚으라는 것. 최대한 세금혜택을 받는다고 해봐도 예금금리는 대출금리보다 항상 낮다. 이민교씨의 부채 평균 대출금리를 연 10% 가량으로 잡으면, 이는 세후 연 10%의 저축에 상응한다. 그러나 현재 어디서도 연 10%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저축상품은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연봉이 3,000만원을 넘는 이씨의 경우 근로자우대저축 가입도 불가능한다. 따라서 부채 정리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구체적인 이씨의 부채상환 전략을 살펴보자. 현재 이씨는 월 40만원씩 이자를 내고 있다. 이제부터 생기는 저축 여력 월 70만원까지 더해, 월 110만원의 부채상환 여력이 있는 셈. 월 110만원씩 원리금 상환 방식으로(대출금리 연 9% 기준) 갚아나가면 대략 5년이면 모든 부채 상환이 가능해진다. 부채를 정리하는 우선순위 원칙은 기간이 짧은 것부터, 그리고 유동부채 먼저 고정부채는 나중이다. 따라서 이씨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마이너스통장, 자동차 할부금, 전세대출금 순서로 우선순위를 정해 갚아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이씨의 은행 전세자금대출 금리는 10.5%인데, 이는 시중 전세자금대출 금리 6.5% 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이씨가 이렇게 높은 금리로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담보가 없는 데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기 전부터 갖고 있던 마이너스 통장을 통한 대출금 1,600만원 때문이었다.그런데 이씨가 대출 원리금을 빨리, 성실히 갚아나간다면 은행과 협상을 통해 이 금리를 낮추는 것이 가능해진다. 임PB는 “2% 이상의 협상 여력이 있을 것”이라고 봤다. 대출금리를 2% 낮출 경우 월 10여만원을 덜 낼 수 있고, 이에 따라 부채 상환 기간도 줄드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한도가 꽉 찬 마이너스 통장은 의미가 없으므로, 이보다 금리가 낮은 원리금 균등분할 상환 방식의 대출로 바꿔타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하지만 임동하 PB는 부채를 정리하고 건전한 개인재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중요한 비결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계획을 세우기는 쉽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부채를 빨리 상환하는 데 최선의 처방은 실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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