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달려온 은행의 산 증인

은행장 대거 등극에서 불명예 퇴진까지 굴곡 많아

지난 92년 11월 16일 새벽.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50대 중년의 남자가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이희도 당시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구로동지점장과 서소문지점장 등을 지낸 이지점장이 갑작스럽게 자살하자 처음엔 모두 의아해했다.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창 잘 나가는 지점장이었고, 자연스럽게 ‘은행원의 별’이라는 임원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상업은행 본점의 자금이 부족할 때는 항상 ‘해결사’ 역할을 했던 터여서 은행에서는 그의 죽음을 상당히 아쉬워했다.이지점장의 자살동기는 경찰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자금동원력을 자랑했던 그의 ‘힘의 원천’이 다름아닌 ‘공(空)CD’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CD란 한번 판 CD(양도성예금증서)를 다시 판 CD를 말한다.예컨대 1억원짜리 CD를 두 번 또는 세 번 팔아 2억원, 3억원으로 예금고를 부풀렸다. 이런 악순환은 CD가 만기가 되면서 한계에 도달했고, 결국 이지점장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상업은행에선 김추규 행장 등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상업은행 명동지점은 이렇게 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상업은행(현 한빛은행) 명동지점이 유명했던 것은 비단 이희도 지점장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한빛은행 명동지점은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지난 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됐을 때 이경식 당시 부총리 등이 실명제가 잘 시행되고 있는지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돌아본 곳이 상업은행 명동지점일 정도로 상업은행 명동지점은 은행지점의 대명사였다. 90년 이후 상업은행 명동지점장을 지낸 11명(한빛은행 포함) 중 6명이 임원 자리에 올랐을 정도로 명동지점장 자리는 임원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였다.비단 상업은행만이 아니다.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명동지점장은 ‘지점장 중의 지점장’으로 꼽혔다. 물론 대우그룹을 거래하던 제일은행의 남산지점, 삼성그룹을 상대로 하던 옛 한일은행의 남대문지점, 현대그룹이 파트너였던 외환은행의 계동지점에는 상대가 안 됐지만 ‘임원이 되려거든 명동지점장을 거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동지점장은 은행원이 선호하는 자리였다.지난 90년대 중반까지 은행장이나 은행임원을 지낸 사람 중 명동지점장을 한 번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조흥은행의 경우 이종연·장철훈 전 행장이 명동지점장 출신이다. 이 전행장은 지난 79년부터 80년까지 명동지점장을 지냈으며, 장 전행장도 88년부터 89년까지 명동지점장을 역임했다.비단 이들만이 아니다. 90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임원은 명동지점장을 거쳐야 했다. 유명 명동지점장으론 김준협·손홍균 전 서울은행장, 박기진 전 제일은행장 등이 꼽힌다. 손 전행장의 경우 입행 11년 만인 30대 후반에 지점장이 된 뒤 6개의 지점장을 지냈다.그리고 명동지점장에서 곧바로 상무로 승진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83년 수신담당 임원을 맡아 제일은행을 4년 연속 수신고 1위 은행으로 끌어올린 박기진 전 행장도 명동지점장 시절 명성을 떨쳤다.현 은행장 중 명동지점장 출신은 이인호 신한은행장이 유일하다. 이행장은 서소문지점장과 융자부장을 지낸 후 지난 87년부터 90년1월까지 명동지점장을 지냈다. 그리고 곧바로 이사대우 영업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은행장 자리에까지 올랐다.그러나 명동지점장의 화려함은 90년대 들어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명동지점장은 ‘과거의 영화’로 묻혀가는 추세다. 명동지점을 먹여살렸던 단자사(투자금융사)와 종금사들이 거의 다 문을 닫았다.증권사들은 여의도로 이삿짐을 쌌다. 명동지점과 일종의 공생관계였던 사채업자들의 세력도 전만 못하다. 그렇다고 명동지점장이 완전히 뒷전으로 밀린 건 결코 아니다. 여전히 많은 은행에선 손가락에 꼽는 대형 점포다.특히 최근 명동지점장들은 과거의 영화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변화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명동지점장이 임원으로 가는 직행 코스에서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명동은 여전히 명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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