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 투자금융사 등 대거 문닫자 위상 꺾여
지난 3월 22일 주총을 열었던 국민은행. 관심은 인사에 집중됐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합병 후 처음으로, 김정태 행장의 사람 기용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였다.김행장은 평소 “은행의 경쟁력은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는 데서 나온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소신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부행장 등 경영진보다 이번 인사의 최고 ‘히트상품’은 단연 명동지점장 인사로 나타났다.국민은행의 전국 지점은 1,200여개. 이 중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동지점’이 은행의 대표선수라는 상징적 의미는 무시하기 어렵다. 그런데 국민은행은 이런 명동지점장으로 30대 여성, 4급 행원(일반 기업으로 보면 과장 또는 대리급에 해당)이던 윤설희씨를 과감하게 발탁한 것이다.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물론, 현재 명동서 일하고 있는 각 시중은행의 지점장들 사이에서도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명동이 어떤 곳이기에 젊은 여성이 지점장 자리에 앉은 일이 이처럼 화제가 된 것일까. 이미 4년 전부터 여성 은행 지점장들이 배출되기 시작해, 이제는 흔한 일이 됐는데도 말이다.직접금융 시장이 규모나 질 면에서 모두 발달되지 않았고 간접금융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명동은 그야말로 금융의 메카였다. 은행은 물론 종합금융사, 증권사, 그리고 사금융업자들까지 모두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현금은 물론 채권, 주식, 어음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가 흩어졌다.대규모 자금 조달은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은행 마감시 자금 계수를 맞추려면 본점에서는 조달 능력이 있는 명동지점의 지점장부터 다급하게 찾아댔다. 따라서 과거 우리나라의 명실상부한 금융중심지였던 시절, 명동지점장은 그야말로 폼 나고 힘있는 자리였다.명동지점장으로 발령이 나면 앞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은행장이 되려면 명동지점장을 꼭 거치는 것으로 여겨졌다(72쪽 기사 참고).하지만 2002년의 금융가 명동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그동안 직접금융시장이 팽창해 은행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축소됐다. 사채시장이 대거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되면서 명동을 근거지로 하던 사채 시장 규모가 줄어들었다.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종합금융사들이 초토화되면서 자금 결재 기능이 각지로 흩어지게 됐다. 증권거래소와 증권전산 등이 여의도에 자리잡고, 증권사들의 본점이 옮겨가 ‘여의도 월 스트리트 시대’가 열리면서 명동의 위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대기업들이 사대문 안을 벗어나 강남으로 옮겨가고, 압구정동·대치동 등 신흥 부촌이 형성되면서 강남으로 돈이 탈출한 것도 한 이유가 됐다. 금융거래는 여의도로, 부유한 개인들은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명동은 이래저래 ‘차 떼고 포 뗀’ 격이 된 것이다.단적으로 규모를 비교하면 명동지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하나은행 명동지점은 여수신 규모 3,400억원으로 강남역이나 삼성역 지점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국민은행 명동지점 역시 여수신 3,600억원으로 규모로 따질 때 이제 국민은행 1,200여개 지점 가운데서 순위에 들지 못하는 지점이다(개인고객 대상 영업분만 비교한 수치) .이렇게 ‘상징성’만 남고 실질적인 은행 대표선수의 역할을 잃어버린 건 명동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은행의 모습이 많이 바뀐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은행의 영업 담당자들은 이제 지점을 단순히 가장 큰 지점, 1등 지점 등으로 비교 분류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은행들은 조직을 개편해 기업고객과 개인고객 영업점을 분리해 운영하고 있다.모두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과 금융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함께 일어난 일이다. 한빛은행 명동지점(옛 상업은행 자리)에는 지점장이 두 명 있다. 1층에서는 개인을 대상으로, 2층서는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한다.바로 옆에 자리한 조흥은행이나 신한은행도 마찬가지다. 명동뿐 아니라 서울 전역에서는 대개의 은행들이 기존 지점에서 기업고객 부문만 분리해 따로 몇 개의 지점을 만들거나, 또는 한 지점에 두 지점장을 두면서 개인점포와 기업점포를 분리했다.또 명동 지점 부근에 대부분의 은행 본점들이 자리잡고 있어 기업고객 부문은 대개 본점영업부로 옮아갔다.지점도 차별화, 단순 비교 의미 없어그러므로 이제 명동의 지점들은 우량 개인고객들을 잡는 데 영업의 초점을 맞춘다. 명동거리에 있는 시중은행 개인고객점포장의 방은, 대개 영업장 안쪽에 자리잡은 VIP 코너 바로 옆에 있다.몇십 년씩 거래해온 거액예치 단골 고객들을 관리하는 것이 이 지점장들의 중요한 업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동지역 상가 번영회, 부근의 섬유관련 무역업체 등 중소기업 고객을 유치하느라 지점장의 하루하루가 바쁘다.조흥은행 명동지점 강종민 지점장은 “아침에 출근하면 상가와 중소 무역업체 등 주요 거래처부터 한 바퀴 돈다”고 했다. 새로 부임해온 국민은행 명동지점 윤설희 지점장은 “VIP 고객을 별도 관리할 코너를 만들고, 새로 입주한 상가 주인들을 상대로 영업에 나서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라고 말했다.반면 이제 은행에 따라 핵심 지점도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한빛은행서 규모가 가장 큰 영업점은 태평로에 있는 삼성센터 지점. 삼성물산 등 삼성계열사가 입주해 있는 삼성본관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역시 기업과 개인고객점으로 나뉘어 있다.기업고객점은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여신 때문에 규모가 큰 지점. 개인고객점은 건물 입주사 직원들의 급여계좌, 특정 회사직원들에 대한 집단 대출, 입주사들과 얽힌 업무 등으로 인해 메이저급으로 분류된다.씨티은행과 HSBC은행은 압구정과 분당에서 저축은행(옛 상호신용금고)들과 함께 철저히 개인 고객을 타깃으로 ‘분당대전’을 펼치고 있다.신한은행은 여의도에만 지점이 일곱 군데다. 서여의도 개인 및 기업지점, 여의도중앙 개인 및 기업지점, 여의도 개인 및 기업, 대기업지점 등이다. 이 일곱 군데의 지점 모두 전국의 신한은행 점포 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메이저 점포들이다.여의도 지점의 경우 대기업·중소기업·개인 담당 등 한 건물에 모두 세 명의 지점장이 있다. 기업고객지점은 여의도의 대기업들을 포함, 증권사들과 연결된 자금결제 등을 주 업무로 삼는다. 개인점포 지점장은 여의도지점 증권거래소나 증권전산, 여의도에 위치한 각종 협회, 그리고 여의도 아파트 지역의 자산가들을 상대로 영업한다.황구연 지점장은 “정치가, 관료, 연예인, 언론인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자산가들이 여의도의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의 특성에 맞춰 영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지금도 한국은행을 비롯해 각 은행의 본점들이 명동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고, 일부 종합금융사 등이 명동에 모여 있다. 명동지점이 모두 작아진 것도 아니다. 한빛은행 박득곤 지점장, 조흥은행 강종민 지점장 등 여전히 명동에는 지점장들 중에서도 베테랑 고참급들이 일하고 있는 편이다.역사가 긴 은행들의 명동지점 위상은 낮아지고 있는 반면 신한은행 등 후발 은행들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명동지점을 확장하기 위해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명동거리 탐방기썩어도 준치, 그래도 서울엔 명동!온통 젊은이들 일색인 강남역이나 신촌 등 서울의 번화가와는 달리, 명동거리 분위기에는 매우 독특한 구석이 있다.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데 어울려 골목골목을 메운다.그에 따라 음식점, 옷가게, 술집 등도 특정 세대의 취향 일색이 아닌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각종 금융기관들은 이 복잡하고 다양한 상업지구들이 만들어내는 ‘명동 분위기’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한빛은행(옛 상업은행) 명동지점을 축으로 해서 은행과 증권사, 투신사, 파이낸스 등 사채업자 사무실까지 복잡하게 모여 있다. 불과 몇 발짝 차이밖에 안 되는데도 골목별로 땅값이 다른 곳도 명동이다.길게는 3년부터 짧게는 3개월까지, 명동에서 울고 웃는 명동의 은행 지점장들은 ‘명동 고객’이 매우 다르다고들 말했다. 우선 고객층이 아주 다양하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인 만큼 명동의 은행에는 국적, 연령, 성별, 직업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온다.두 번째 특징은 이 다양한 고객 중에서도 고령자가 많다는 것. 특히 몇십 년 동안 계속 거래를 해온 ‘단골 중의 단골’에는 몇억∼몇백억원대의 자산가가 많아 은행의 VIP 고객이 되고 있다. 이들은 강남, 구로, 송파 등 서울 각지에 거주하는데도 굳이 명동까지 찾아온다고 한다.명동 금융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각종 금융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지역내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다는 것.땅값이 워낙 비싸고 건물이 오래 되어 시중은행 명동지점들은 장소가 비좁은 편. 그래서 상대적으로 매장이 넓은 조흥은행 명동지점은 이런 중장년층의 단골 약속장소가 되기도 한다.여기서 4년째 일하는 박찬숙 과장은 “아침에 우리 은행 영업점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증권사 들렀다가 투신사 한 바퀴 돌고, 점심 식사하고 다시 은행에 와서 쉬고 일도 보는 장년 고객들이 많다”고 말했다.하지만 은행측은 이렇게 자리 차지하는 고객에게 절대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모두 상당한 자산을 가진 단골 고객이기 때문이다.한동안 신흥 상업지구에 밀려 침체돼 있던 명동 상권은 최근 2년 사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중. 특히 진입로에 자리잡은 옛 코스모스 백화점 건물이 리모델링을 통해 복합 영화관 등을 갖춘 쇼핑몰로 재개장하면서 이곳 상인들의 기대가 크다.이에 따라 명동의 지점장들은 이 건물에 입주할 상인들을 잡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