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컴팩 합병 철회 여부 놓고 법정공방

칼리 피오리나 휴렛팩커드(HP) 회장이 잇따른 시련에 빠졌다. 컴퓨터 경기의 하락으로 어려움에 빠진 HP의 ‘구원투수’로 외부(루슨트테크놀로지스 출신)에서 영입된 이후 2년여 동안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그녀 앞에 놓인 가시는 컴팩과의 합병 주주 투표에 대해 법정에 서게 된 사건이다.HP 공동창업자인 고(故) 윌리엄 휴렛의 아들이자 이사회 멤버인 월터 휴렛이 “컴팩과의 합병은 HP 정신(HP Way)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이때부터 HP 경영진은 휴렛 이사와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였다. 때로는 HP의 장래와 이익에 대한 엇갈린 의견을 개진하면서, 때로는 인신공격적인 광고를 하면서 주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그 싸움은 지난 3월 19일 열린 주총에서 일단락됐다. 피오리나 회장은 “미세하지만 충분한 지지를 얻어 합병이 승인됐다”며 승리를 선언했고, 휴렛 이사는 “차이가 근소해 아직은 알수 없다”며 패배를 시인하지 않았다.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HP 경영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 정기 주총에서는 휴렛 이사를 이사회 멤버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가능했던 일이다.그러나 월터 휴렛은 엄청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HP 경영진이 도이체방크에 이익을 제공하는 대가로 지지를 유도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델라웨어 법원에 주총 무효 소송을 낸 것이다. HP는 이 소송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법원은 휴렛의 손을 들어줬다.이에 따라 HP-컴팩 합병의 미래는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게 됐다. 이 싸움에서 휴렛은 실리콘밸리에서 ‘사외 이사의 표상’으로 부상했다. 경영진의 독주를 견제하는 ‘진정한 주주의 대변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특히 경영진의 계획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 요즘 실리콘밸리의 언론들은 그에 관한 기사에서 어김없이 그에게 ‘반대파(Dissident)’란 수식어를 붙인다.그는 최근 사외 이사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관심을 끌고 있다.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외 이사의 역할이 가장 잘 이뤄지고 있다는 미국에서조차 사외 이사는 ‘거수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의 눈에는 비쳐지고 있는 모양이다.그는 사외 이사들이 경영진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서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내세웠다. “미국 기업의 사외 이사들은 고립돼 있고 경영진에게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많은 기업의 이사회 회의장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그는 사외 이사 제도 개혁을 위한 몇 가지 대안도 내놓았다. 경영진들을 배제한 가운데 사외 이사들끼리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 한편, 경영진과 연계를 갖지 않는 법률 및 금융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 등이다.아무래도 면전에서 반대하고 나서기 어려운 게 인지상정인 만큼 경영진이 없는 곳에서 사외 이사들끼리 모인다면 좀더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지 않겠는냐는 것이다.월터 휴렛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실리콘밸리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특히 HP 전·현직 직원들 사이에서는 휴렛에 대한 지지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HP 측은 직원들이 대다수가 합병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지만).스탠퍼드 법대 토마스 헬러 교수는 “기업의 일을 바깥으로 갖고 나온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면서도 “휴렛 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헬러 교수는 특히 이는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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