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투자자 대체할 버팀목” 기대감 높아

회사원 김주호씨(30)는 월급 명세서를 받아들 때마다 터져나오는 울분을 삭이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그는 이게 노후를 대비하는 연금이란 생각이 안 들고 세금 ‘떼인’ 것 같은 억울한 맘이 앞서는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도 김씨와 같은 생각이다.이에 반해 자본시장 참여자, 특히 주식 운용 관련 전문가들은 국민연금기금을 매우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이들은 시장에서의 연금기금의 역할에 크게 주목한다. 주가지수 1,000을 넘어서고, 이를 계기로 한국 주식시장이 한 단계 질적인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큰 시점인 까닭이다.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한국증시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서는 큰손 중의 큰손인 국민연금기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수 1,000을 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넘어선 후 다시 떨어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미국 주식시장의 지속적인 가치 상승이 가능했던 것은 기관의 장기투자 때문이었다. 한국 증시 역시 지속적으로 가치를 높여가기 위해서는 기관투자가, 즉 큰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시장 심리가 불안하거나 주가가 조금만 빠지면 자금이 빠져나가 휘청대는 허약체질, 즉 변동성이 크고 지수가 400대까지 가기도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투기가 아닌 장기투자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시장에 안정적인 자금이 투입돼야 하는 것이다.하지만 현재, 국내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손은 외국인 자금이다. 이들은 적당한 수익률만 달성하면 언제라도 돈을 빼서 떠나려는 성향이 짙다. 외국인들은 2월부터 지금까지 2조원 가량의 주식을 팔았다.우리 기업의 실적이 좋아지는데도 이미 지난해 매입해 충분한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다른 투자처를 찾아 떠나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주식시장과 기업가치 상승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메릴린치증권 이원기 상무는 “작년 같은 경우 주식을 싸게 매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를 잡은 것은 외국인들이었다”며 “이런 기회를 외국인에게 놓치지 않으려면 장기투자자금 즉, 기업가치가 올라가 주식이 제 값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기업가치와 주식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대형 자금이 필요한데 유일하게 이같은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연금뿐이라는 얘기다.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규모는 2000년말 61조원이다. 2001년 말에는 75조원, 2002년 말에는 90조원, 2003년 말에는 94조원으로 예상된다. 2019년 말이면 400조원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전체 기금 중에서 금융부문에 투자되는 규모는 2000년말 25조원, 2001년말 45조원, 2003년말 83조원이다. 금융부문 중에서도 주식관련 운영자금은 2001년 3조 5,000억원이다. 2002년 말에는 4조원대, 2003년에는 6조원대로 예상하고 있다.만약 앞으로 국민연금 중장기투자정책위원회가 제시한대로 총 기금의 30~40%가 주식에 투자된다면 2019년말 주식투자 규모는 140조원에 달하게 된다. 이는 2000년말 거래소 시가총액 188조원의 7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 큰 손 중의 큰손이 되는 셈이다.이렇게 자산 규모가 커서 시장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연금은 투자 방향 자체가 자신의 수익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종일 교수는 “지금처럼 국공채나 예금 투자에 치중하면, 국공채와 예금 이자율을 낮추게 되고 결과적으로 연기금 자신의 수익률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연금의 주식투자 확대는 90년대 미국 등에서 추진되었던 정책으로 금융 시장 안정에 기여해 기업 투자환경을 호전시키는 순기능을 했다”고도 분석했다.이와 같이 주식시장 참여자들이 연금의 금융부문 투자 확대에서 기대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증권시장에서 기관투자가의 비중을 확대하고, 주식 보유 기간의 장기화를 가져오고, 전체 자본조달시장(직접시장+간접시장) 중에서 간접시장(은행)의 비중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일종의 선순환을 기대하는 것이다. 국민연금 주식투자, 합리적인 장기투자가로서의 역할, 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 이익 극대화, 기업 가치 상승, 주식시장 체질 강화, 국민연금 수익률 확대로 이어지는 ‘모두가 행복한’ 시나리오다.기관투자가 역할 적극적 수행 기대KDI 국제정책 대학원 김우찬 교수는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한다. 그는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함으로써 기업 지배구조를 감시하고 개선해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김선영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역시 “과거에는 기업이익이 대주주나 정치자금 등으로 샜지만 이제는 이익이 기업에 그대로 남아 배당과 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주가 변동성이 줄어들고 장기상승이 예상되면 연금가입자에게 높은 수익을 돌려 줄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이미 국민연금은 합리적인 투자가로서 좋은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외부 투자기관에 아웃소싱을 하면서, 운용사 선정 기준의 모범을 만든 것이다. 보통 운용사에 자산을 맡길 때는 워낙 말썽 소지가 많기 때문에 잡음을 없애기 위해 자금을 똑같이 나눠 안분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방법으로 인식돼 왔다.그러나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심사기준을 만들어 차등 배분하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이 운용 아웃소싱을 맡기고 있는 곳은 30여개 기관이다. 아웃소싱 회사를 ABC 등급으로 평가해 등급이 더 좋은 회사에는 맡기는 물량을 늘리고 등급이 나쁜 회사는 탈락시킨다.평가 기준은 수익률, 투자절차의 투명성, 위험관리, 컴플라이언스(내부통제), 재무안전성과 펀드매니저의 이직 가능성, 투자철학 등으로 명시돼 있다. 삼성투신운용 김용광 과장은 “운용사 선정 절차의 투명성에 있어서 국내 어느 자금보다 합리적이다”라고 평가했다.그는 “수수료는 적게 내고, 요구하는 건 많으니 투신사 입장에서 편한 고객은 아니다”라면서도 “국민연금 자금을 많이 배정받으면 좋은 회사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반대로 배정 못 받았다고 하면은 고객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거나 믿을 수 없는 회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게 돼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유치에 나선다”고 말했다.복지부, 중장기 운용전략 마련에 고심그러나 이와 같은 ‘모두가 행복한 시나리오’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국민연금은 연단위의 운용계획밖에 세우지 못했다. 연금이라는 장기 자산을 운용하는 데 투자 철학이나 큰 밑그림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여기서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중장기투자정책위원회(위원장 정운찬 서울대 교수)’를 만들어 긴 안목으로 연금자산을 운용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복지부가 지난해 10월 투자자문사 사장 증권사 임원 등 자산운용 업계의 전문가와 학계 교수들과 연금전문가들을 모아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에게 연금운용 개선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6개월여 만인 지난 4월 17일 개선안을 내놓았다.개선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국민연금 운용 관리체계 자체에 대한 개선방안과, 중장기 기금운용 목표 및 자산배분에 대한 것이다.먼저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위원회의 개선안 골자는 실무평가위원회를 폐지하고 자산운용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용기획평가단’을 상설화해야 한다는 것. 또 실무평가위원회와 기금운용위원회를 통합해 상설기구화 하고, 위원장은 복지부장관이 아닌 금융전문가로 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한 가지가 아니라 세가지의 대안을 만들어 내놓았다.한편 중장기 기금운용 목표 및 자산배분에 대해서는 △2012년 까지 현재 자산의 40%에 달하는 공공부문 투자를 9.5%까지 축소해야 한다 △현재 7% 수준인 주식투자비중을 20~30%까지 확대하며 △부동산 실물시장에까지 투자대상을 확대해 2012년까지 전체자산의 5% 가량을 부동산 투자에 배분한다 등이다.이같은 중장기투자정책위원회의 제안은 현재 국민연금기금의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 4월 30일 보고됐고, 공청회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공개됐다. 국민연금기금 연구센터 한성윤 팀장은 “애초 위원회를 구성할 때는 여러 가지 안 중에서 대안으로 지목할 한 개를 명시하고, 구체적인 실행 일정과 방법까지 만든다는 계획이었으나 여기까지 끝내지는 못했다”면서 “그러나 내년쯤이면 실행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한 증권사 관계자는 “합리적인 투자자가 합리적인 운용을 가능케 한다”면서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국민의 노후 자금 용도이므로 안정적으로 지급돼야 한다는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면서도, 주식시장 가치 상승에 기여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국민들이나 정치권에 공감대가 형성돼 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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