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큐먼트 산업’ 전성시대

‘종이가 사라진다?’지난 99년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빌 게이츠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 자신의 저서 (Business@the Speed of Thought)를 소개했다. 디지털 신경망 시스템과 지식경영 데시보드를 활용해 이른바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들자는 게 골자였다.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제록스사의 릭 토만 사장은 뉴욕에서 오는 도중 빌게이츠의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빌 게이츠는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들자고 했지만, 결국 그 내용을 알리기 위해 400여 페이지의 종이책을 발간했다.”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들기 위해 종이책을 발간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지적한 것이다.그의 이런 ‘짓궂은’ 발언은 계속됐다. “제록스 역시 MS사와 전자책 개발을 위해 제휴하긴 했지만, 디지털 시대가 된다 해도 종이인쇄나 복사는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앞으로 프린터·복사기 같은 도큐먼트 장치들이 5년간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숫자가 배로 증가해도 e메일의 50%는 인쇄를 하거나 복사를 한다는 주장이다.따라서 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사이에 인쇄나 복사의 양은 4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또 아직까지 여전히 기업의 지식량의 46%가 도큐먼트(문서)에 담겨 있고, 이 중 26%는 종이로, 다른 20%가 전자 도큐먼트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빌 게이츠와 릭 토만의 ‘종이 논쟁’은 적어도 3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릭 토만이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그 양이 줄어들었어야 했을 종이 문서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 더 두드러진다. 국내 인쇄용지 생산규모는 해마다 늘어났고, 후지제록스·한국앱손 등 이른바 도큐먼트 업체들의 매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게 이를 뒷받침한다.문서생산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는 도큐먼트 컴퍼니들은 오히려 디지털시대에 맞춰 계속해서 첨단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기존의 프린터, 복사기, 팩스 등을 한데 묶은 디지털 복합기시장은 인터넷 발달에 힘입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문서장치업체들의 발빠른 행보가 적중한 것이다. 문서가 사라질 것이란 예측을 뒤엎기라도 하듯 이들 도큐먼트 컴퍼니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디지털 카메라의 화소량도 하루가 다르게 급증하고, 거의 천연색을 재현해내는 초고해상도 컬러프린터가 출시되면서 사진 역시 문서처럼 바로바로 출력할 수 있게 됐다. ‘포토 도큐먼트’ 시대가 온 것이다. 필름 대신 메모리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거의 무제한으로 찍을 수 있고 인화가 아닌 ‘인쇄’를 할 수 있게 돼 ‘사진 문서’는 마치 A4용지처럼 폭증하게 됐다.MS사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전자책 시장이 이렇다할 진전이 없는 게 사실이다. 2000년 가 7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으로 출간됐을 때 미국의 각종 매체들은 이제 전자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전자책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리더(Reader)’를 출시했을 때 미국 지디넷(ZDNet) 뉴스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보안을 요하는 전자책들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전자책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종이책을 팔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역시 전자책의 해적판 출현이 보다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캐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고, 프린트해 배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해리포터의 해적판이 24시간 내에 나왔던 것만 봐도 신빙성이 있는 지적이다.앞으로 3~5년 내에 전자책이 전체 책 시장규모의 10%인 23억달러를 차지할 것이라는 업계 전망에 대해 지도 매우 회의적이다. 아직까지는 전자책의 표준화된 소프트웨어와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종이(아날로그) 문서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폭증하고 있다고 해서 끝임 없이 아성을 쌓아갈지는 미지수다.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데이터량이 폭증한 것이 문서출력량 증가를 가져 오긴 했지만 절대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니다.즉, 가히 폭발적으로 쌓인 데이터량에 비하면 종이문서로 인쇄되는 양은 0.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미약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99.9% 이상의 데이터는 어디에 있을까. 결국 새로운 문서 ‘e다큐먼트’에 담겨 있거나 담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웹페이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사전 단말기를 이용한 전자책(e-Book)이나 전자신문(e-Paper) 등도 모두 정보와 지식 콘텐츠를 담는 하나의 ‘문서’로 자리잡은 것이 사실이다. 회의실이나 강의실 등에서 프로젝터로 주사되는 스크린 도큐먼트나 3차원 영상으로 떠 있는 홀로그램 도큐먼트도 차세대 문서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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