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하고 마약에 빠지고 정체성 ‘흔들’

재벌 2세. 태어날 때부터 한 손에는 부와 다른 한 손에는 명성을 거머쥔 사람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성인이 됐고 일부는 부모의 뒤를 이은 훌륭한 사업가로,일부는 부모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탕아로 전락하기도 했다.미국은 어떨까. 얼마 전 휴렛팩커드와 컴팩의 합병추진을 전면에 나서 반대한 사람이 바로 창업자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재벌 2세들에 대한 관심이 새삼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도 가정교육이나 자기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천덕꾸러기 재벌 2세의 상징은 세계 최대 기업 월마트의 상속녀인 앨리스 월튼(52). 창업자 샘 월튼의 큰딸인 그녀와 형제들이 가진 주식(지분율 38%)은 시가로 무려 825억달러에 달한다.1 휴렛팩커드 창업주 아들인 월터 휴렛. 2 월터 휴렛(왼쪽)과 그의 아내. 3 잡지 창업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기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얼 그레이브스(아래 가운데)와 그의 장남인 얼 그레이브스 주니어(위 오른쪽).4 창업자인 휴 헤프너(가운데)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 5 휴 헤프너의 딸인 크리스티(왼쪽). 6 월마트 상속녀인 앨리스 월튼.그녀의 개인재산만도 25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앨리스는 최근 경제잡지인 가 여성으로는 세계 최고 부자라고 공식 선정했을 정도.지난 92년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 잠시 월마트의 구매담당으로 일하기도 했던 앨리스는 회사를 나와 투자회사를 직접 차렸다가 실패하기도 했다.두 번 이혼한 경험을 갖고 있는 그녀는 그동안 교통사고를 세 번 냈는데, 그 중 한 번은 한쪽 다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사고였다. 가장 최근에 일으킨 사고는 98년에 있었다.사고장소는 아칸소주. 아칸소주는 월마트의 본사가 있고 아직도 많은 월튼패밀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세금을 많이 내는 월튼패밀리는 이곳에서 거의 귀족대우를 받고 있다.사고 당시 앨리스는 만취한 상태였는데 사고를 조사했던 경찰관은 앨리스가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아주 건방지게 말했다고 재판장에서 증언했다.이 재판은 유명인의 음주사고라는 점에서 당시 많은 언론이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도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렸던 앨리스는, 이 때문에 거액을 주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공보담당 비서를 역임했던 인물을 채용해 대언론문제를 맡기기도 했다.재판이 끝난 뒤 그녀는 언론의 쏟아지는 취재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듯 아칸소주를 떠나 텍사스주의 한 목장으로 이주해 조용히 살고 있다.2세 소유기업 전체 근로자 절반이상 고용재벌 2세들 중 성공한 사례도 많다. 포드자동차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어려운 회사를 살려내고 있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와 잡지의 CEO인 크리스티 헤프너 등이 대표적이다.그러나 성공한 몇몇 인물 뒤에 많은 2세들이 그의 부모들이 일중독에 빠졌던 것과는 달리 알코올과 마약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2세들은 생활하기에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외부 사람들이 지켜보는 등 어항 속에 살고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잘못해도 금방 드러난다.전문가들은 이들 재벌 2세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미국의 전체 근로자인 1억1,100만명 중 절반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등 이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실제 휴렛팩커드의 창업주 아들인 월터 휴렛은 15만 종업원들의 운명이 걸린 컴퓨터산업 사상 가장 큰 거래를 막판에 거의 뒤바꿀 뻔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그의 합병반대는 칼리 피오리나 CEO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회사측은 월터가 학자이자 음악가여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른다고 공격했지만 이번 경우는 2세들의 생각이 회사경영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었다.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재벌 2세들은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월리엄 S. 팰리 CEO 전 회장의 아들로 스스로 재벌 2세이기도 한 윌리엄 팰리는 워싱턴DC에서 개업한 의사다. 그는 재벌 2세들의 알코올과 마약남용에 대한 카운셀러로 이들의 알코올·마약중독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전문가들은 재벌 2세들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 할 문제 중 가장 큰 것이 ‘자기확신부족’이라고 말한다.성공 부모와 동일시하는 분위기 ‘괴로움’사람들이 자신들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가진 돈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담배재벌이었던 아버지로부터 12억달러를 상속받은 도리스 듀커는 93년 사망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산은 행복의 장애물이었다”고 고백했다.그녀는 “젊었을 때 남자들을 사귀면 몇 번 만나지도 않아 모두 한결같이 자기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며 “그 말이 얼마나 진실이었을까”라고 의심했었다고 한다.두 번째 큰 문제는 정체성의 갈등. 성공한 부모와 동일시하는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잡지의 창업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얼 그레이브스의 장남인 얼 그레이브스 주니어(40)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수많은 상패와 상장에 둘러싸여 자랐다.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아버지와 다르다는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그에게 ‘버치’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잡지 창업자인 휴 헤프너의 딸인 크리스티(49)는 어렸을 때 헤프너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혼한 어머니의 새 남편 성을 사용했고 사람들에게 헤프너와의 관계를 절대 먼저 말하지 않았다.지금 플레이보이의 CEO를 맡고 있는 그녀는 “보통 청소년들처럼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버지인 휴 헤프너는 “크리스티는 성인이 돼 모든 것을 판별할 수 있을 때 헤프너란 성을 되찾았다”고 말한다.세 번째는 무절제한 행동이다. 재산과 유명한 이름으로만 성공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많은 유혹이 따른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보다 못하다는 자격지심이 이들이 쉽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빠지는 요인이다.의사를 고용해 마약을 구하고 변호사를 채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들은 ‘실제 삶’이 아닌 ‘테마파크’에 산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그레이브스 주니어는 때문에 “아이들에게 삶의 어려움을 가르치기 위해 잔디를 깎고 밤늦게까지 눈을 치우도록 하는 등 많은 일을 시켰다”고 얘기한다.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55)는 성공한 뉴욕의 부동산개발업자였던 아버지보다 더 잘되기 위해 노력해서 꿈을 이룬 경우다.물론 530억달러의 자산을 갖고 있는 빌 게이츠(46)나 재산이 350달러에 달하는 워런 버핏(71) 등은 2세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재산을 자식들이 아닌 자선단체나 회사를 운영하는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식이다.“돈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빌 게이츠)는 철학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dong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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