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누르고 캐주얼 대표주자로 ‘우뚝’

미국인들, 특히 미국 남자들은 베이지색 계통의 카키색을 좋아한다. 입고 다니는 바지의 대부분이 카키색일 정도로 ‘카키광’들이 많다. 한때 청바지에 밀리는 듯했던 카키색 바지는 지금 다시 거리패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카키색이 청바지를 누른 것은 좀처럼 주름이 생기지 않고,얼룩을 예방하는 등 의류업체들의 신기술 개발 노력이 한몫 한 것으로 평가된다.텍사스주 댈러스의 석유엔지니어인 빌 앤더슨씨(47)는 전형적인 카키 수집광이다. 옷장에는 카지바지가 20여 벌 걸려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한두 번 입은 채 그대로 걸려 있는 것들이다. 그는 “세탁소에서도 빼기 힘든 지저분한 얼룩이 쉽게 묻는다”며 “쉽게 얼룩지는 것이 카키바지의 최대 약점”이라고 말한다.카키바지는 미국 남자들 사이에서 거의 캐주얼 바지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골프장에서, 직장에서 카키 일색이다. 순모나 합성섬유로 만든 카키열풍은 뜨거웠다. 젊은이들이 직장에서 캐주얼을 입기 시작한 90년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카키 열풍은 청바지에 밀리면서 조금씩 수그러들었다.뉴욕의 시장조사 컨설팅회사인 NPD그룹에 따르면 카키를 포함한 캐주얼바지 판매액는 2000년에 43억5,000만달러로 절정에 달한 뒤 다음해에 11.5% 떨어진 38억6,000만달러로 줄어드는 등 사상 첫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청바지 판매는 꾸준하게 늘어 지난해 49억4,000만달러에 달했을 정도다. 이는 새로운 세탁방법과 바지 끝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등의 신제품 개발에 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최근 들어 기업계의 캐주얼 의상이 점점 정장스타일로 변하고 있다. 청바지보다 정장바지와 비슷한 단정한 카키가 다시 주목을 받는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앤더슨씨와 같은 카키광들은 “카키바지의 품질이 조금 더 개선된다면 더 많은 카키바지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먼지의 색깔’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힌두어인 카키가 옷을 상징하기 시작한 것은 18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 힌두어를 사용하는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인도 주둔 군대의 제복으로 이 색상을 처음 사용한 것. 인도지역 주변 환경에서 위장복 색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알맞은 까닭이었다. 이 카키 군복은 1차대전 중에는 엷은 오렌지 계통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초원이나 삼림지대에서 잘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요즘 카키를 승부수로 띄운 대표적 회사는 시카고에 본사를 둔 하트막스라는 의류회사. 유명 브랜드인 토미 힐피거 등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바지를 공급하는 이 회사는 두 개의 주름을 세우고 커프스 장식을 한 정장 캐주얼 모드의 58달러짜리 혼모 카키바지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이 회사 브루스 벨루치 부사장은 “지난해 벽돌타일 무늬처럼 풍부한 질감으로 짜여진 135달러짜리 고급 혼모 카키바지가 크게 히트했다”며 “이제 남자들이 또 다른 카키바지를 사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자신한다.하트막스는 골프할 때나 여행할 때 입는 카키바지가 6~7벌 되는 데이비스 시스킨씨(47) 같은 사람을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애드워터란 마켓커뮤니케이션회사의 사장인 시스킨씨는 “멋지게 입는 것이 양복 정장을 입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정장을 하고 일하러 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또 “새로운 카키바지가 나올 때마다 하나씩 샀다”고 덧붙였다.통상 남자들은 취향을 바꾸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메이커 입장에서는 불만이 많은 고객이더라도 다시 한 번 남자들을 사로잡을 기회가 많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들은 요즘 기술개발과 마케팅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최대 의류업체 중 하나인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브랜드 중 하나인 ‘닥커스’는 요즘 정장버전에 주력하고 있다. 그동안 가장 많은 불평거리였던 커피나 와인, 케첩, 잉크 등을 쏟아도 얼룩지지 않는 제품들을 만들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한 벌에 52달러씩 하는 이 ‘얼룩 예방’ 신제품 카키바지의 광고는 오랜 거래선인 인터퍼블릭그룹의 자회사 푸트 콘 & 벨딩이 준비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커피를 바지에 쏟았지만 이것이 바지 위에서 구슬처럼 뭉치면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 광고의 핵심 메시지다. 닥커스는 지난해 바지 안에 7개의 주머니가 있어 남자들이 지갑, 휴대전화, 페이저 등을 넣고 다녀도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성인을 위한 작업복’이라는 모빌바지로 매출을 크게 올리기도 했다.물론 카키바지 열풍이 얼마나 더 시장을 확대시킬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도 많은 편이다. 주된 이유는 남자들이 패션에 크게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의 WSL전략소 매컨설팅의 웬디 리브맨 사장은 “여성 캐주얼 바지 시장은 디자이너들이 구슬이나 신선한 색상을 넣는 방식으로 최근 몇 년간 급속히 팽창하고 있지만 남자 바지 디자이너들은 색상을 폭넓게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키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이미 몇 벌의 바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5Kg 이상 살이 찌지 않는 한 웬만한 기능혁신으로는 시장확대가 어렵다”는 설명이다.게다가 지금 카키는 공급과잉이다. 갭이 4년 전 지르박을 추는 커플들을 동원한 ‘카키스윙’이란 광고로 화려하게 카키시장에 등장한 이후 카키에 주력을 하고 있는 등 대부분 남성의류메이커들이 카키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의류애널리스트인 엠 코즐로프는 “지금 경기장에는 너무 많는 선수들이 뛰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다.하지만 시장에 뛰어는 의류업체들은 어려움을 겪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값싸게 질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새로운 ‘카키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dongin@hankyung.com카키의 역사*1848년=영국군이 인도 식민지를 통치할 때처음 카키유니폼 도입.*1986년=리바이 스트라우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겨냥해 풍성한 카키바지인 닥커스를 시판.*1991년=미국 최대 알루미늄 제조업체인 알코아가기업 사상 처음으로 캐주얼을 근무복으로착용토록 허용.*1997년=헐렁한 주머니 많은 카키가 젊은층의인기를 얻음.*1998년=갭의 ‘카키스윙’ 광고가 크게 히트.*2001년=청바지가 부상하면서 카키열기가 시들해짐.*2002년=직장에서 정장스타일을 강조하면서 주름지지않거나 얼룩지지 않는 기능성 카키가 다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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