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태풍 피하자”… ‘품질경영’동분서주

전담팀 구성, 예방.방어로 역할분담 대책마련 부심...경고문도 세밀히 작성

“셋 중에서 하나 고르는 일이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참치캔 경고문 후보 3개를 놓고 사장님도 저도 1시간 이상 씨름해야 했습니다.”3개월째 동원F&B ‘PL태스크포스팀’의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임영환 차장은 참치 캔 경고문 표기 선정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처음에는 1줄짜리 문장을 쓰려고 했지만 좀더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듬다 보니 결국 2줄짜리 문장이 나왔습니다. 이러다 브랜드 명 자리마저 없어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제조물책임(PL)법 시행으로 기업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제조물에 결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PL법 시행이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인 것도 부담요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전담팀을 만들거나 품질관리를 강화하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대기업들은 주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동원F&B, 풀무원, 한국코카콜라 등이 바로 이런 케이스다. 동원F&B는 3개월 전부터 ‘PL태스크포스팀’을 운영해 왔다. 다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식품연구소, 마케팅팀, 생산지원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직원을 차출했다.이들 전담직원은 활동영역을 예방과 방어로 나눠 준비를 하고 있다. 먼저 예방에는 품질관리와 문서관리, 경고문 수정 등이 해당한다. 방어는 소비자들이 소송을 걸어올 것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험가입이 대표적이다.PL법 시행일이 다가오면서 최근 동원F&B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은 경고문 수정작업이다. 참치를 비롯해 캔 제품이 많아 캔을 여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사항을 알기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임팀장이 회사대표와 함께 고심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전 직원의 아이디어를 접수해 최종적으로 3개의 후보까지 추려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장시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이 회사는 경고문 표기를 수정하는 데 캔 하나에 200만원의 디자인 비용을 쏟아부었다.대기업, PL법 시행 ‘위기이자 기회’회사측은 앞으로 이 같은 경고문의 종류가 많아지고 재미있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조리과정을 거쳐야 하는 냉동식품에는 ‘조리 중 오랜 시간자리를 뜨지 말라’는 문구를 새로 추가하기로 했다. 주부들이 조리 중 오랜 시간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회사관계자들은 품질관리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보인다. 식품유해요소 중점관리 기준(HACCP)을 따르는 등 이미 철저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 모니터요원을 배치하고 작업장의 안전도 강화하고 있다.한 예로 현재 작업장에서 쓰이는 모자는 직원들 사이에서 ‘날개 달린 모자’로 불린다. 모자의 챙이 어깨까지 내려와 머리카락이 떨어져도 옷 속으로 들어가게 돼 있기 때문이다.대기업들은 대체로 이번 PL법 시행이 기업에 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잘 활용하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동원F&B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대기업들은 자사의 품질관리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이 점을 오히려 마케팅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구체적으로 삼성전자는 신모델 개발시 ‘결함예방 승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제품은 PL전담팀장의 확인이 있어야만 출고된다는 것. 이 회사관계자는 이를 다른 회사와 구별되는 독특한 제도라고 설명했다.준비 부족 … 법시행에 불만 갖기도‘PL태풍’의 영향권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중소기업들이다. 자칫 잘못해 소송에 휘말리면 파산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통계를 보면 제대로 준비하는 기업은 1%도 안 된다. 게다가 PL방어책 차원에서 PL단체보험에 가입한 기업은 지난 5월 현재 223개 업체에 불과하다. 상당수 기업들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셈이다.최근 중기청이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컨설팅 비용 등을 지원하고 나선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특히 지난 6월25일에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의뢰해 중소기업 PL분쟁조정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중소기업은 자금, 인력 등의 부족으로 PL분쟁 발생시 자체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 출범이유다. 중기청이 중기협중앙회에 편성한 예산 중 이번 분쟁위에 편성된 예산만 약 3,000만원에 달한다.하지만 많은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PL법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한 상태다. 특히 완구업종의 일부 업체들은 현 상황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부산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승용완구 제조업체 505토이즈의 한 관계자는 “지금 와서 교육을 하고 보험을 마련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한 마디로 완구업체는 비상”이라고 단언하는 이 관계자는 “경고문의 표기 예를 보여주는 식의 구체적인 교육이 시급한데 중기청에서는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며 “보험만 해도 법 시행 일주일 전까지도 인가가 미뤄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지금 시점에서 기업들은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분쟁을 줄여가는 지름길인 만큼 품질의 우수성을 입증할 과학적인 근거를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계와 연계해 임상실험 결과를 축적하는 식의 공동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인터뷰 신충교 중소기업청 PL담당 사무관“품질관리 신경쓴 기업, 걱정 안해도 됩니다”“미국의 사례들만 보고 지나치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중소기업청 내 PL법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신충교 정책총괄과 행정사무관은 PL법 시행에 대해 크게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다.“이름이 생소하다고 해서 기존에 없던 법이 생긴 거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기존에 민법상에 있던 불법에 관한 조항이 보완돼서 나온 것이 PL법이죠. 그동안 품질관리에 신경을 써 온 기업이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그는 대부분 기업에서 교육자료로 쓰이고 있는 미국의 사례들은 PL법에 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배심원의 역할이 중요하고 성문법 자체보다는 판례가 중요한 법체계를 갖고 있어서 피해사례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것.“경고문 표기도 그래요. 칼처럼 명백하게 위험한 물건이야 꼭 필요하지만 생활에서 부담 없이 사용되는 물건들에 대해 경고문을 새로 넣기 위해 비용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죠.”하지만 그는 일부 업종과 수입을 주로 하는 업체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자동차, 전기·전자, 완구 등의 업종 업체들은 이번 PL법 시행이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특히 동남아 등지에서 품질입증이 안된 저가 제품들을 들여오던 수입업체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다.“동남아 쪽도 거의 PL법을 시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PL법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자국에서는 문제가 될 물건들을 시행하지 않은 우리나라에 값싸게 넘긴 경우가 많다는 얘기죠. 사실 이런 국제거래의 불균형 해소가 PL법을 도입한 이유 중 하나라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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