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 대신 ‘취미’ 권하는 회사 늘어

여직원 많은 외국계 회사 중심 속속 도입, 남성 중심 국내 제조업체도 변화 조짐

테팔(TEFAL) 브랜드로 유명한 (주)그룹세브코리아는 독특한 회식문화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주방용 기구가 주력인 이 회사는 정기적으로 요리를 만들어 전직원이 즐긴다.특히 일부 직원들은 아예 요리동호회를 구성해 한 달에 한 번씩 재료를 직접 사다가 요리를 해 사내 분위기를 더욱더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선후배가 함께 요리를 하면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일에 대한 능률이 더 오를 수 있다는 것이 회사측 설명이다.이 회사 역시 한때는 일과가 끝난 후 근처 술집으로 몰려가 술을 먹는 등 한국식 회식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회의실에 튀김기와 바비큐 그릴, 칼과 도마 등을 들여놓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특히 전임 지사장인 웨슬러씨는 자신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손수 요리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열성을 보이는 등 지금의 회식문화 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물론 처음에는 참석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전체 직원 가운데 불과 몇 명만이 모였다. 하지만 이후 음식에 관심 있는 직원들이 하나둘 모였고, 정기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자는 데까지 발전했다. ‘회의실 회식’에서 경험을 쌓은 직원 김소영씨(27)와 강정식씨(28)는 지난해 9월 조리기능사 자격증도 땄다.술판 위주의 회식문화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기업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고, 회사 내에 여직원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1차에서 술을 마시고, 2차에서 노래를 부르는 식의 소비성 회식 대신 건전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즐기는 모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한솔교육 역시 직원들 사이에 ‘회식은 절대 술마시는 행사가 아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회식날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가는 무안을 당하기 일쑤다. 대신 함께 모여 땀 흘리며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기회로 활용한다.이 회사 한민철 과장은 “누가 언제부터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최근 들어 회식날 술을 마시러 가자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며 “모임 자체가 건전해서인지 참석률도 아주 높다”고 말했다.나이든 고참 직원들 소외감 느끼기도이 회사의 회식은 주로 팀별로 이루어지는데 팀장이 주축이 돼 구성원들의 의견을 들어 회식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 통보한다. 의견은 하향식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신참직원들이 회식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직원들이 선호하는 행사로는 영화나 연극관람, 운동 등이 꼽히고 간혹 콘서트장에 가기도 한다. 미식가들이 많은 팀에선 이탈리아 전문식당 등 평소에 갈 기회가 적은 곳을 찾아가 미각을 돋우기도 한다.한국존슨도 회식자리에서 술병을 찾아보기 어렵다. 남성보다 여성 직원들이 더 많은 이 회사는 회식장소 섭외를 말단직원이 하고, 참석 여부도 본인 판단에 일임한다. 그러다 보니 회식장소는 고깃집보다 낙지집이나 디스코텍 등이 주류를 이루고, 끝나는 시간도 오후 9시를 넘지 않는다.이 때문에 일부 고참급 남성 직원들이 오히려 참석을 꺼릴 정도다. 나이가 든 남성들 입장에서 참석해봐야 별로 즐길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반면 신세대 직원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회식인 만큼 적극적으로 참석해 단합의 장으로 만든다.김현진 인사팀 차장은 “앞장서 남녀고용평등을 실시하다 보니 회사 내에 자연적으로 신참이나 여성 직원들을 배려하는 회식문화가 형성됐다”며 “젊은 사원들이 주도하다 보니 조직에 생동감이 넘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바쁜 직장생활속 재충전 기회로최근 펼쳐지고 있는 회식문화 건전화 바람의 가장 큰 특징은 술을 멀리한다는 점이다. 가능하면 술을 마실 수 있는 자리는 피하고 전체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권성철 우림광고기획 대표는 “술을 마셔 봤자 그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많다는 걸 서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최근 회식자리에서 폭탄주를 아예 추방했다.그룹 차원에서 지난해 직원윤리강령이 선포된 이후 나름대로 회식문화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결과다. 술은 마시되 1차에서 간단하게 끝내자는 의미다.또 하나 회식을 취미생활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늘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직원들이 좋아하는 일을 회사 차원에서 주선해주는 것이다.한솔교육의 경우 헬스나 족구, 탁구, 볼링 등 운동을 좋아하는 직원들을 위해 장소를 적극적으로 섭외해주며, 단암전자통신은 일과 후 직원들이 각종 취미생활을 할 수 있게 적극 지원하고 있다.또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 중인 사비지도 술을 마시는 회식보다 함께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는 데 적극적이다. 이들 회사는 대부분 취미모임 후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것으로 회식을 대신한다.회식문화 건전화에 적극적인 회사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여성 직원들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앞서 예를 든 그룹세브코리아나 한솔교육, 한국존슨 등은 여성들이 회사의 주축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들 중심으로 회사의 문화가 형성되고, 회식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또 하나 국내 회사보다 외국계 회사들이 더 의욕적이다. 외국의 합리적인 기업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술보다는 문화생활을 즐기는 방향으로 직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한국존슨의 한 관계자는 “회식하면 곧바로 남성 중심적인 술을 떠올리는 것은 분명 많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외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하지만 여기에도 희망은 보인다. 최근 여성민우회가 전개하고 있는 회식문화캠페인에 상당수 기업들이 동참을 선언했거나 참여를 적극 검토 중이다.이 단체의 정승림 간사는 “캠페인을 시작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20여 개의 회사 및 단체들이 참여를 신청했다”며 “이들 가운데에는 남성문화가 중심을 이루는 국내 제조업체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돋보기 건전회식문화 캠페인술잔안돌리기·2차안가기 전개건전한 회식문화를 유도하기 위한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최근 ‘회식문화를 바꾸자’는 슬로건 아래 길거리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자체 웹사이트(http://bagguza.womenlink. or.kr)도 공식 오픈했다.이 캠페인에는 벌써 한솔교육, 이네트, 대구백화점, 코리아닷컴, 단암전자통신, 롯데상사, 한국존슨 등 많은 기업들이 취지에 동감한다며 참여를 신청해놓고 있다.캠페인은 크게 4가지 항목으로 구성돼 있는데 술잔 안 돌리기, 퇴폐업소 안가기, 여직원 성희롱금지, 2차 안 가기 등이 주요 내용이다. 참여업체 가운데 한국존슨은 이미 사원 각자에게 기업의 캠페인 참여를 알리고, 이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한 관계자는 “이번 캠페인은 불평등한 직장문화를 바꾸는 데 근본 취지가 있다”며 “많은 기업들과 직장남성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일부는 실천선언에 사인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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