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인상업체 ‘인하 U턴’… 불황 ‘진행중’

“전반적으로 아직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주재하는 일본정부의 월례 경제보고회의가 끝난 지난 7월11일 오후. 게이오대 교수 출신의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상은 경기 현주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을 찍고 상승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답변했다.달변에다 기관총처럼 빠른 스피드의 말투를 구사하는 그는 일본의 경제회복에 최고 위협적 존재로 꼽혀온 ‘엔고’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할 것 없다”는 톤으로 못박았다.엔고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너무 과장되게 알려진 면이 많으며 사실은 일본경제에도 약이 되는 것이 적잖다는 주장이었다.한마디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 넘치는 기자회견이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일본정부가 노골적인 엔저 유도 정책을 들고 나왔을 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비판이 고조되자 그는 “엔화 약세는 일본경제의 체력과 괴리돼 있지 않다”는 묘한 논리로 맞선 적이 있었다.따라서 일본경제가 허약해져 있는 상태이니 엔화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던 그가 불과 수개월 만에 엔고 지지로 돌아선 것은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현재로선 아직 ‘불황’이라는 단어를 지워 버릴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엔고 같은 역풍이 닥쳐와도 컨디션 회복에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다음날 일본언론은 한결 같이 다케나카 경제재정상의 주장에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죽을 쑤었던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기를 낙관할 수 있는 청신호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언론의 일치된 시각이었다.일본언론은 정부가 경기현상을 오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비 최전선을 최우선적으로 제시했다. 국민들이 경기회복을 실감하기는커녕 계속 싼 물건만 찾아다니고, 상인들은 장사가 안된다고 아우성인데 웬 경기호전 타령이냐는 것이다.이와 함께 일본정부의 경기판단을 뒤집는 증거물로 3~4개월 전 가격을 올렸다가 도저히 버텨 내지 못하고 다시 가격인하로 돌아선 상당수 품목과 해당 기업들의 고민을 들었다.불황의 먹구름이 걷혔다고 판단해 일본 기업들이 가격을 인상한 후 디플레 압력에 굴복하고만 대표적 사례로 외식과 컴퓨터, 주류, 휘발유 등을 꼽고 있다.외식업체들 중에서도 지난 7월10일 ‘59엔 햄버거 시판’을 발표한 일본 맥도널드의 고민은 일본경제를 뒤덮고 있는 디플레의 골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투명 거울이나 마찬가지다.맥도널드는 광우병파동으로 매출이 격감하고, 엔화 약세로 원가부담이 가중됐던 지난 2월 평일의 반액할인 판매(65엔)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일본의 고물가 장벽을 깨부수는 데 앞장서겠다면서 지난 2000년부터 햄버거를 평일에는 개당 65엔에 팔며 기세등등하게 초고성장 가도를 달려왔던 맥도널드로선 뜻밖의 전략선회였다.맥도널드의 전략변경에는 매출부진이 원인이 됐지만 평일이건 휴일이건 언제나 개당 80엔씩에 팔면 매장이 변함없이 고객들로 붐빌 것이라는 낙관적인 판단도 한몫 한 것이 사실이었다.하지만 맥도널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햄버거 가격을 80엔으로 올린 후 매출은 더욱 가파른 하강곡선을 그렸다. 반액 할인 판매를 고수했던 지난 1월의 전년 동월 대비 감소폭이 약 10%였던 데 반해 6월은 25%까지 육박했다.이에 따라 맥도널드의 상반기 경상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52%나 감소한 60억엔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평일 반액 판매 전략을 포기한 후 맥도널드가 자체 예상했던 83억5,000만엔을 23억엔 이상이나 밑도는 수치다.시장분석가들은 광우병파동으로 타격을 입은 탓도 있지만 맥도널드가 경기전망을 낙관적으로 봤다가 큰코 다쳤다며 디플레 장벽이 너무 높고 험난하다고 개탄하고 있다.디플레 압력에 무릎을 꿇은 외식업체는 맥도널드뿐만이 아니다. 롯데리아, 모스버거 등 일본 패스트푸드 업계를 대표하는 대형 기업들이 맥도널드에 못지않은 가격인하 카드를 경쟁적으로 들고 나오고 있다. 개당 120엔 이상이 보통인 편의점 주먹밥에도 88엔짜리가 지난 6월 말 등장, 주머니가 가벼운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가격인상을 통한 제값 받기를 다시 포기한 또 다른 대표적 사례는 컴퓨터시장에서도 수두룩하게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 업체들은 반도체 가격 상승과 수요 회복을 이유로 지난 5월부터 기종별로 출고가격을 거의 10% 전후로 올렸다.그러나 이 역시 시장상황과 어긋나면서 매출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지자 업체들은 앞다퉈 가격인하에 동참하고 있다. 일본IBM은 지난 7월10일 발매한 데스크톱 컴퓨터 새 모델의 가격을 동급 기종 구제품에 비해 최고 27%나 인하했다.컴팩, 후지쓰, NEC 등 다른 경쟁업체들도 모두 비슷한 폭의 인하를 검토 중에 있어 컴퓨터시장은 5월 이전과 같은 치열한 염가전쟁에 휘말릴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정유사들도 가격인상했으나 제값 받는 곳 없어휘발유는 정유사들이 모두 도소매가격을 지난 4월부터 ℓ당 3엔씩 모두 6엔을 올려 받기로 결정했으나 일선 주유소에서는 인상된 값이 제대로 지켜지는 곳이 거의 없는 상태다. 휘발유 판매가격은 지난 5월 초 ℓ당 평균 100엔을 넘었으나 전문가들은 이달 중 95엔 이하까지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점치고 있다.맥주와 맛은 별 차이가 없으면서도 맥아함량은 25% 이하여서 판매가가 캔당 145엔 전후인 발포주는 메이커들이 죽기살기 식으로 싸움에 매달리면서 135엔짜리 제품이 속출하고 있다.기린맥주의 선제공격과 아사히, 산토리 등 라이벌 업체들의 응수로 촉발된 발포주 저가경쟁은 신제품 개발 싸움까지 겹치면서 주당들을 연일 싱글벙글하게 만들고 있다. 발포주는 일부 술 도매상의 판매가격이 24캔들이 1상자당 2,400엔 밑으로 내려가면서 맥주업계 전체를 속 빈 강정으로 만들 계륵과 같은 존재로 급변했다.다시 가격을 내리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과 관련, 시장분석가들은 일본경제를 뒤덮은 불황 먹구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쓰고 싶은 대로 돈을 뿌리는 ‘펑펑족’이 수없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아직 지갑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미래를 불안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일본총무성이 발표한 지난 6월의 도쿄도 소비자물가지수는 97.9(2000년을 100으로 할 경우)로 1년 전보다 1%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기업들의 가격 재인하 러시와 관련, 닛코솔로몬바니즈증권의 나카노 마사유키 이코노미스트는 “맥도널드의 사례는 염가공세로 시장을 확장한 기업이 이 같은 전략을 포기했을 때 고객을 종전처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말했다.아울러 “가격인하가 시장 전체에 만연된 지금 기업들의 경쟁은 체력싸움으로 변모했다”고 지적한 후 “디플레 수렁 속에서 기업들은 앞으로 더 골병이 들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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