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위한 것’ vs ‘투자철수 위한 수순’

경영진 ‘자금 충분해 굳이 상장유지할 필요가 없다’ 해명에 노조·소액주주 ‘배당금 대주주가 독점하기 위한 것’ 반발

브릿지증권이 증권사 사상 처음으로 자진 상장폐지를 결의한 가운데 소액주주와 노조가 그 배경에 의혹을 제기하는 등 반발하고 나서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브릿지증권은 지난 1월 일은증권과 리젠트증권이 합쳐져 만들어진 회사.피터 에버링턴 브릿지증권 사장은 7월16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공격적인 M&A를 추진하기 위해 브릿지증권을 상장폐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3,100만주 가량의 소액주주 지분을 주당 2,000원에 매입해 이를 소각, 감자하면서 자진 상장폐지하겠다는 것. 이와 관련, 브릿지증권 관계자는 “향후 추가 합병을 할 경우 저평가돼 있는 시장가격으로 합병비율 등을 협상하는 것보다 순자산 가치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덧붙였다.현재 브릿지증권 주가는 1,900원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순자산 가치(NAVㆍ자산을 주식 수로 나눈 것)로 계산하면 4,000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현금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탈상장하는 이유라고 밝혔다.경영자와 대주주간 갈등설 증폭이 화근하지만 노조와 소액주주들은 에버링턴 사장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대주주가 상장을 폐지한 후 배당을 독점하기 위해 상장폐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액면가의 70%나 되는 고율배당을 실시한 브릿지증권은 2001년에는 상법상 배당가능 재원이 없어 한푼의 배당금도 지급하지 않았다.하지만 브릿지증권은 지난 2001년 회계연도에는 30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기 때문에 다음 회계연도에는 배당금 지급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이들은 “증권사측이 고배당을 해 현금을 빼낸 뒤 회사를 팔아넘기고 한국에서 철수하기 위한 수순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브릿지증권노조의 한 관계자는 또한 이번 상장폐지 이후 2차 감자가 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상장폐지로 주식을 순자산 가치로 평가할 수 있게 한 뒤 다시 자본감소를 시도하면 대주주는 주식을 시장가치로 평가받을 때보다 더 많은 자본금을 회수할 수 있다.또한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전체 감자 대상인 3,100만주 중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 감자 대상 주식이 자사주인지, 대주주인 KOL의 지분인지 명확하지 않다”며 “만일 그 대상이 KOL 지분이라면 대주주는 감자를 통해 투자금의 일부를 회수할 수 있게 된다”고 귀띔했다.브릿지증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소액주주의 물량을 매입 대상으로 하되 다른 주식(자사주나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 매수 청구가 들어올 경우에는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소액주주와 노조를 대리하는 김주영 한누리법무법인 변호사는 이 같은 의구심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상장폐지를 주도하는 에버링턴 사장이 최근 대주주와 갈등을 빚어 해임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에버링턴 사장의 해임추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릿지증권의 지배구조를 알아야 한다. 브릿지증권의 지분구조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오른쪽 위 그림 참조)RPGL(리젠트 퍼시픽 그룹 리미티드)이 27%, SWKOL 25%, KOL 13%, 미국 위스콘신주 연기금(SWIB)이 7%를 갖고 있다.다시 RPGL은 홍콩 i리젠트(회장 짐 멜론ㆍ대표이사 제이미 깁슨)가 대주주이고, SWKOL은 조세회피지역인 라부안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로 SWIB와 KOL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KOL 역시 페이퍼컴퍼니로 i리젠트(40%), SWIB(27%), 기타 주주(33%) 등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브릿지증권의 대주주는 i리젠트와 위스콘신주연기금(SWIB)으로 좁혀진다.이들은 주로 지주사인 KOL을 통해 브릿지증권의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KOL의 대표이사는 피터 에버링턴 현 브릿지증권 사장. 그런데 i리젠트와 SWIB는 지난 7월11일 홍콩증권거래소에 피터 에버링턴 브릿지증권 사장과 로미 윌리암슨 브릿지증권 부사장을 KOL임원직에서 해임시키기 위해 임시주총을 연다고 공시했다.이들의 해임이유는 KOL 운영문제에 있어 대주주와의 의견 상충 때문이라는 것. 다음날 i리젠트 이사회의장 지미 깁슨은 KOL 주주들에게 “현 KOL 경영진을 물러나게 한다”는 편지(사진)를 보냈다.김변호사는 “에버링턴 사장과 대주주간 분쟁이 발생하자 곧이어 상장폐지가 발표됐고, 이는 그간 대주주들이 밝혀온 한국투자방향과도 배치된다”면서 이 같은 정황을 감안, “에버링턴 사장이 제시한 상장폐지 이유를 그대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증권사측 ‘사장 해임된 바 없다’ 해명그동안 KOL 대주주들은 한국투자를 정리하고 떠날 방침임을 밝혀 왔다. i리젠트는 지난 5월16일 홍콩 증권거래소에 “리젠트와 SWIB은 KOL에 대한 투자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로 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실제로 이들은 KGI그룹에 KOL지분을 넘기려고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렬됐다.그런데 에버링턴 사장은 상장폐지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이미 몇몇 증권사와 M&A를 위해 접촉하고 있으며 합병을 통해 브릿지증권을 국내 5ㆍ6위의 대형 증권사로 키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요컨대 피고용인인 에버링턴 사장이 주주의 뜻과는 정반대로 한국투자를 늘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셈이다.김변호사는 이번 상장폐지신청을 ▲에버링턴 사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했을 가능성 ▲일시적으로 사이가 벌어졌던 대주주와 에버링턴 이사진이 다시 연합, 함께 결정했을 가능성▲에버링턴 사장이 혼자 결정했으나 이해관계가 일치해 대주주가 이를 묵인하고 있을 가능성 등을 모두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입지가 좁아진 에버링턴 사장이 빨리 차익을 실현해줄 수 있다는 카드를 (대주주에게) 보여주고 승부수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그는 “대주주와 브릿지증권 경영진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연합했다가 갈라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KGI와의 딜이 실패로 돌아간 후 대주주의 입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대주주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직접 접촉을 시도한 김변호사는 “만날 약속까지 정했는데 이들이 일방적으로 취소했다”면서 “i리젠트와 SWIB 역시 KGI와의 매각협상이 실패로 끝난 지금 한국투자를 털고나갈 방법이 묘연해졌기 때문에 당분간 에버링턴 사장이 하는 대로 지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브릿지증권 관계자는 “대주주가 에버링턴 사장을 해임하려 한다는 데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면서 “어쨌든 지금 최고경영자는 에버링턴 사장이므로 이사회가 결정한 상장폐지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데 소액주주가 이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브릿지증권 소액주주와 노조측의 주장을 요목조목 반박하면서도 “발언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없다”고 한발 뺐다.이처럼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한 브릿지증권의 피터 에버링턴 사장의 대답을 듣기 위해 수차례 해명 및 반론을 요청했으나 ‘시간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돋보기헤지펀드 운영 … ‘진승현 게이트’ 연루되기도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i리젠트그룹은 주로 헤지펀드를 운영하며 국가별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치고 빠지기’ 식 투자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장인 짐 멜론은 영국인으로, ‘멜론뱅크’로 유명한 멜론가문의 한 사람.저평가된 국가의 회사들 중 특히 값이 싸거나 투자회수가 용이한 업종 기업을 정해 집중적으로 매입, 곧 이를 되팔고 나오는 형태의 투자를 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증권업계에서는 러시아 공기업들에 투자해 엄청난 차익을 남기고 되판 사례가 널리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에는 IMF 위기 와중인 98년, 대유증권 매입을 시작으로 재무위기로 인해 헐값에 매물로 나온 중소형 금융사들을 사들이면서 진출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매입 후 차익을 받고 되파는 형태의 투자가 쉽게 이뤄지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리젠트그룹 회장 및 KOL 회장을 겸임했던 짐 멜론이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됐다.2000년 말 불거진 ‘진승현-리젠트 게이트’의 핵심은 짐 멜론 회장과 KOL이 리젠트종금의 MCI코리아 계열사 부당대출 및 리젠트증권 주가조작에 얼마나 개입되었는지 하는 것이었다.증권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i리젠트그룹이 한국 금융회사들에 투자해온 패턴을 보면 이들이 장기적 안목을 가진 투자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단기 투자 후 빼내간 흔적이 많다.리젠트가 처음 국내에 들어온 것은 98년 대유증권을 인수해 리젠트증권으로 바꾸면서부터. 차례로 경수종금과 해동화재를 인수해 각각 리젠트종금과 리젠트화재로 바꿨고, 리젠트자산운용도 신설했다. 또한 일은증권을 인수해 리젠트증권과 합쳤다.이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대유증권과 일은증권이 합병한 브릿지증권뿐이다. 경수종금을 인수한 리젠트종금은 ‘진승현 게이트’와 불법대출에 연루되면서 인출사태가 빚어져 부실금융사로 지정, 동양현대종금에 합병됐고, 리젠트화재와 자산운용 역시 청산됐다.이에 그치지 않았다. 합병 브릿지증권의 전신 중 하나인 일은증권에서는 지난해 4월 대주주 KOL이 리젠트종금 부당지원을 지시했다가 홍준기 사장 등 한국인 임원들이 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자 한꺼번에 이들을 물러나게 하고 피터 에버링턴과 로미 윌리암슨 등 KOL이 추천한 외국인 이사들을 임원으로 앉힌 사건도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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