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 차단하고 불황타개 ‘일석이조’

“위조지폐를 막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지만 경제적인 부대효과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새로 손질해야 하니 우선 이 분야의 수요가 클 것이고, 전철, 지하철 등 자동판매기를 사용하는 곳마다 모두 보수를 해야 할 터이니 관련 업체들은 일감이 크게 늘어날 것 아니겠습니까? 소비자들은 빳빳한 신권을 사용하게 돼 기분이 좋아질 테고….”지난 8월2일 오후 도쿄 가스미가세키 관청가에 자리잡은 일본 재무성의 기자회견실. 올해로 80세를 맞은 고령의 시오카와 마사주로 재무상이 환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2004년부터 사용하게 될 새 지폐의 견본을 들어 보이며 신권이 일본경제에 안겨줄 훈풍이 제법 상당할 것이라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시오카와 마사주로 재무상의 기자회견은 신권 발행을 깜짝쇼처럼 공개한 자리가 아니었다. 발표에 앞서 이날 아침 일본언론은 일제히 재무성과 일본은행의 새 지폐 발행 계획을 톱기사로 전하며 신권 발행에 얽힌 뒷소식과 앞으로의 파급효과 등을 상세히 다뤘다.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신권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일본은행은 1만엔권, 5,000엔권, 1,000엔권 등 모두 세 가지 지폐를 새로 만들어 2004년부터 인쇄, 보급하게 된다. 일본의 주요 지폐에 몽땅 신권이 등장하는 것은 나카소네 내각이 정권을 쥐고 있던 지난 84년 이후 만 20년 만의 일이다. 나카소네 내각은 미국 록히드사의 뇌물수수사건으로 자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급락하자 민심수습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신권 발행으로 맞불을 놓았었다.일본언론은 이번의 신권 발행 계획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지폐의 얼굴을 꼽고 있다. 지금까지 남성이 독차지했던 지폐 표면의 인물로 일본 역사상 여성이 최초로 채용됐으며, 첨단 과학시대에 걸맞게 의학자의 얼굴도 등장, 화폐 이미지에 상당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새 지폐 2004년부터 인쇄·보급5,000엔권에 초상이 등장할 히구치 이치요(1872~1896)는 일본의 개화기 시절 눈부신 활약을 보이다 요절한 여류문인이다. 빈궁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여성과 가난이라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키재기’, ‘13일밤’ 등 명작소설을 다수 남겨 문단과 여성계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일부 서민가정에서는 딸자식을 낳은 후 히구치 이치요처럼 자라주길 기대하며 부모들이 이름을 본따 짓는 사례도 적지 않다.1,000엔권에 등장하게 된 노구치 히데요(1876~1928)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의학자 중 한 사람이다. 역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가난을 딛고 미국에 유학, 훌륭한 의학자로 성장했다.그는 매독병원체의 순수 배양에 성공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황열병 병원의 발견을 증명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자진해 건너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일본의학계는 그가 인류와 의학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며 그를 세계적 인물로 받들면서 존경을 아끼지 않고 있다.일본정부는 그러나 1만엔권은 현재와 같이 개화기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의 초상을 그대로 두는 한편 디자인과 위조방지 장치를 보완하기로 했다.신권에 등장할 인물의 선정은 전적으로 재무성, 그중에서도 시오카와 마사주로 재무상이 전권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장래를 생각해 여성과 학술, 선구자 등 세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선정했다”고 설명했다.인물선정에 대해서는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고위 정치인과 여성, 학술계도 모두 만족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고이즈미 총리는 “좋은 결과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위인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선정돼 잘됐다”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일본의 신권 발행은 이번이 태평양전쟁 패망 후 16회째다. 하지만 지폐 교체의 폭과 의미에서 이번 조치는 종전의 어떤 경우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게 일본언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일본정부와 통화당국은 2004년 신권 발행의 핵심이 급증하는 위조지폐를 차단하는 데 맞춰져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통화를 위조하는 것은 최악의 범죄다. 위조지폐를 만드는 것에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은 유럽에서 이미 상식화돼 있다.”하야미 마사루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1월 기자회견에서 엔화 위조지폐에 노골적으로 강한 분노를 보인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정부는 급증하는 엔화 위조 사범으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일본경찰에 따르면 상반기에 적발된 엔화 위조지폐는 1만엔권이 3,401장, 5,000엔권이 503장, 1,000엔권이 5,979장으로 이미 지난 한 해 동안의 전체 위조지폐 실적(7,613장)을 훌쩍 뛰어넘었다.일본정부를 괴롭히는 위조지폐 사범은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사용경로가 현금자동지급기 등으로 갈수록 확대되고 ‘빠칭코’, 편의점, 철도 등의 자동판매기에서 발견되는 위조지폐가 급증하면서 일본은행과 경찰의 단속망은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기 일쑤였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 북한 등 제3국인이 조직적으로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위조지폐까지 속출, 일본경찰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고성능 컬러복사기로도 위조 불가능일본정부는 신권 발행의 1차 목적이 위조지폐 차단에 있는 만큼 신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하이테크 기술을 총동원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빛의 양에 따라 색과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는 홀로그램 기술을 응용하는 것은 물론 발광잉크, 마이크로 문자 등 최신 기법을 모두 사용해 고성능 컬러복사기로도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다.여성의 경우 수염이 없어 위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점 때문에 지금까지 지폐 얼굴로 채용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 지폐 곳곳에 숨어 있는 차단장치로 얼마든지 범죄조직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일본은행과 재무성은 2001년 가을부터 신권 제작을 극비 협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고이즈미 총리에게 보고를 마쳤으며 정기국회가 끝날 때에 맞춰 지난 8월2일 뚜껑을 열었다는 것이 관측통들의 귀띔이다. 일본은행은 신권 발행 시기를 약 1년 반 이후로 잡은 데 대해 “너무 시간이 길면 위조지폐범들에게 엉뚱한 생각을 심어줄 수 있으며, 반대로 지나치게 짧을 경우 ATM 등의 준비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신권 등장에 대해 일본 금융계는 희비가 교차하고 있으나 산업계는 은근한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은행들의 경우 ATM 보수로 대당 최소한 30만엔 정도의 부담을 안아야 될 것이 분명하며 은행당 200억~300억엔의 돈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그러나 다이이치경제연구소는 신권 발행의 경제적 효과가 전체적으로 볼 때 1조엔은 거뜬할 것이라고 분석, 장기 불황에 지친 산업계에 꿀맛과 같은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연구소는 1장당 17엔으로 추정되는 신권의 제작비용 1,700억엔, 전국적으로 15만대에 달하는 ATM 보수비 약 1,500억엔, 555여 만대로 추정되는 자동판매기 보수비 1,400억엔 등을 직접 비용으로 꼽고 있다. 이 밖에 실제 작업현장에 투입될 시스템 엔지니어들의 잔업수당 등으로 5,000억엔 이상의 경제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한편 신권 발행 소식이 전해진 8월2일 도쿄증시에서는 인쇄, ATM제작업체, 자동판매기업체 등 관련 회사들의 주식이 최고 10%까지 점프, 이날 하루만은 신권 훈풍이 모처럼 증시에도 밝은 웃음을 안겨준 것으로 나타났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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