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도는 현금 “어찌 하 오리까”

“현금 과잉 상태는 골다공증과 같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은행 관계자는 기업 내 현금을 지나치게 많이 유보하고 있는 것은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이렇게 꼬집었다. 골다공증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돼 언젠가 거동조차 못하게 하는 큰 병으로 다가오듯이 기업들의 투자위축이 어느날 갑자기 한국경제를 쓰러뜨리는 병인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실제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보유한 현금은 천문학적으로 부풀고 있다. 삼성전자의 보유 현금은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6조1,000억원. 지난해 말 2조8,000억원에 비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말에는 8조원대로 늘어날 전망이다.현대자동차도 지난해 말과 비교해 6개월 만에 현금이 3,000억원 이상 늘어나 유가증권 등을 포함하면 현금보유(현금 및 현금성 자산) 규모가 6조원대에 달하며, 포스코도 1조2,000억원 상당의 현금성 자산을 안고 있다.이런 추세라면 올 연말 기업 보유 현금자산은 600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적정 현금보유 규모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마냥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대기업의 현금보유가 급팽창하고 있는 것은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사상 최대를 기록한 반면, 국내외 경기에 대한 불안감으로 투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채를 ‘확’ 줄여 놓은데다 이자율마저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금융비용 역시 감소했다.이에 따라 제조업체의 부채비율은 4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97년 말 396.3%에 육박했던 2,175개 제조업체의 평균부채비율은 2001년 말 기준으로 180% 선까지 떨어졌다. 이는 1967년의 151.2%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12월 결산 상장기업들의 올 상반기 실적만 놓고 비교했을 때는 부채비율이 평균 110% 선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기업들의 투자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부터 3개월 연속 증가했던 설비투자추계지수는 지난 6월부터 컴퓨터와 자동차 등에 대한 투자가 줄면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5% 감소했다. 2/4분기만 비교할 때 전년 대비 0.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렇게 기업들이 과다하게 보유한 현금은 오히려 독이 된다. 저금리로 인한 역마진 현상과 원화절상에 따른 환차손 등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현금보유가 늘어나면서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깎아먹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단기예금의 금리가 5%대에 머물고 있는 관계로 그냥 현금을 보유할 경우 ROE가 떨어지게 된다. ROE의 하락을 막기 위해 최고경영자(CEO)들은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는 방법을 쓰는데 단기적으로는 주가가 상승하는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수익원을 찾는 노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그래서 일부 기업들은 늘어나는 현금을 어떻게 운용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국내외 경기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설비나 신규사업투자는 활발하지 못하다. 주우식 삼성전자 IR담당 상무는 “보유 현금을 사용하는 우선순위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투자에 두고 있다. 다음은 부채상환이지만 삼성전자는 이미 지난해부터 현금보유 규모가 부채를 웃돌고 있어 최근에는 주식가치를 높이는 데 더 많은 현금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최근 1조원대의 자사주를 취득하겠다고 공시한 뒤 지난 8월6일부터 매일 26만6,000주의 보통주와 5만6,000주의 우선주 매수신청을 내놓은 상태다.기업뿐만 아니라 각종 연기금과 금융기관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기업의 자금이 남아돌면서 회사채 발행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99년 이후 지난 7월까지 회사채는 순증 발행된 적이 없었다. 즉 신규발행액보다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재발행하지 않고 갚은 금액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채권시장의 거래금액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20조원 가량이었으나 최근에는 5조∼6조원 규모로 급감했다.기업의 무차입경영 선언이 늘어나면서 은행 경영도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다. 기업에 돈이 넘치자 은행돈이 가계대출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의 대기업 대출은 지난 4월부터 3개월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에 비해 가계대출은 지난 5월과 6월 각각 6조5,038억원과 4조4,562억원이 늘었으며 7월에도 4조769억원이 늘어나 증가 추세가 꺾이지 않았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원은 “은행이 투자은행 업무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생각은 않고 가계대출이나 신용카드 영업 확대 등 쉬운 영역만 파고 있다”며 “가계대출 비중이 기형적으로 계속 늘어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또한 기업이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성장률이 둔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현금 과다 보유의 가장 큰 부작용으로 경기후퇴를 드는 전문가들도 많다. 최근 소비자물가가 하향안정세를 지속하고 있지만 이는 환영만 하고 있을 일이 못된다. 7월에도 소비자물가는 0.3% 하락했다. 이는 6월의 0.1%에 비해 하락폭이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의 과다한 현금보유가 투자위축으로 이어져 나중에는 내수실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7월의 소비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도 부진한 모습이다. 7월 소비자기대지수는 한 달 만에 다시 하락한 107.8을 기록했다. 여전히 100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나 소비자들의 기대가 연초 수준으로 되밀리고 있음을 보여준다.최선임연구원은 “현금보유가 최근처럼 많은 것은 위험한 수준”이라며 “일본 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현금을 쌓아두다 지난 10년간 경기가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한화투신운용 홍춘욱 투자전략팀장은 “기업들이 소비자로부터 얻은 잉여를 투자를 통해 돌려줘야 하는 게 순리”라며 “하지만 최근처럼 성장의 과실을 기업들이 독점하게 되면 부의 왜곡과 악순환이 일어나 경제붕괴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홍팀장은 특히 “조 단위의 흑자를 올리는 회사가 투자를 안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포기한 것”이라며 “하루빨리 투자처를 찾지 못한다면 디플레이션이 초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기업들이 신규투자에 나서게 하는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 한국은행 박재환 정책기획국장은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가장 큰 변수”라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가 미국의 소생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정책당국도 뾰족한 투자유인책이 없음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미국만 쳐다보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일본식 장기불황 우려일부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보유현금을 사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업인수합병(M&A) 시장의 활성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구조조정 차원의 우호적 M&A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80년대 후반 활발하게 일어났던 적대적 M&A까지 포함한 얘기다. 적대적 M&A가 자유롭게 진행된다면 현금이 많은데도 주가가 싼 회사가 좋은 사냥감이 된다.여기에 차입금이 전혀 없고 현금성 자산이 시가총액과 같은 회사가 있다고 하자. 이론적이긴 하지만 이런 회사는 공짜나 다름없다. 시가총액만큼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돈으로 그 회사가 발행한 주식을 모두 사서 상장폐지하고, 회사가 갖고 있는 현금으로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으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그 회사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생기는 세후 순이익은 고스란히 모두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가상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M&A가 활발하게 일어나면 이와 유사하게 현금보유량이 많은 회사들이 표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경영자들이 좀더 긴장하고, 현금을 합리적으로 투자하거나 주주들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식의 적대적 M&A에 대해 부정적인 정서가 강한데다 노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현실에서의 적용이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새롬기술의 경영권 분쟁이 촉발되면서 우리 증시에서도 M&A와 관련된 기업이 관심을 모으고 있어 제도적 규제만 해소되면 우리도 적대적 M&A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M&A 전문 부티크인 ACPC의 이황상 대표는 “현재 적대적 M&A를 막는 제도적 장치는 5%룰을 제외하곤 없는 상황”이라며 “본질적인 면보다 시장에서의 반감이나 정서가 더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지난 80년대 말 일본의 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면서 엔화강세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수출이 어려워지고 디스인플레이션이 일부 출현하자 일본의 대기업들은 투자보다 투기에 나섰다. 그 결과 주식, 부동산, 유명 화가의 그림 등에 돈이 몰렸지만 이내 버블은 붕괴됐다. 결국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경기후퇴 현상에 빠진 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런 맥락에서 지금처럼 기업들이 투자를 아끼고 현금자산 운용에만 치중할 경우 우리 경제도 일본식 불황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개별기업으로 보면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유리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투자가 위축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가까운 곳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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