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식 내놓아야’ 공방 벌이는 속내이슈를 만든 것은 김정태 국민은행장이다. 지난 8월12일 연세대에서 열린 한국경제학회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김행장은 “국민은행 지분은 외국인이 70% 소유하고 있는데 외국투자가들은 정부가 은행경영에 간섭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면서 “민영화를 하려면 정부는 1주도 갖고 있지 말아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에 대해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같은달 21일 전부총리가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지분을 팔라던데?”라는 질문을 던지자 “매각할 때가 되면 팔 텐데 은행장이 그런 얘기를 할 바 아니다”면서 발끈했다.은행민영화의 실무자들도 김행장의 발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다고 언제 은행경영에 간섭했다는 것인가. 어디 그런 일 있으면 들어보자”고 재정경제부 은행제도과 주형환 과장은 흥분했다. 주과장은 “지난 1월 정부보유 은행주식 매각 추진 일정을 내놓았다”며 “그당시 밝힌 대로 계속 진행할 따름”이라고 설명했다.김행장의 발언 이후 은행 관계자들의 반응은 “정부 지분이 있다는 이유로 감사원의 감사를 받는 게 번거롭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쪽으로 모아졌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때도 의도는 있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현욱 금융팀 부연구위원은 “(김행장이 발언한 학술대회는) 경제학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던 만큼 이해할 만한 사람들에게 ‘은행도 엄연한 회사이니 자율경영을 해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것 아니겠느냐”면서 “평소 시장주의자를 자처해 온 김정태 행장의 일관성 있는 발언”이라고 풀이했다.김정태 행장이 외국투자가들로부터 받는 지지는 상당하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그의 발언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미 수차례 외국의 언론 등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김행장은 지난 8월27일 미국의 경제통신사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퍼섹 주니어로부터 ‘금융계의 영웅’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또 한번 외국투자가들로부터의 ‘인기’가 증명된 셈이다.외국투자가들이 이처럼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것이 그들이 김행장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한 외국계 대형 펀드의 한국책임자는 “김행장은 그동안 꾸준히 외국투자가들이 불안해 하는 부분을 개혁하는 데 앞장서 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행보를 보여준 김행장이 앞으로도 이를 계속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치켜세우는 것이라는 설명이다.현재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을 제외하고 대형 시중은행 중 우리은행, 조흥은행, 서울은행 3곳에 정부가 대주주로 있다. 우리금융 지분는 86.5%, 조흥은행 지분은 80%, 서울은행 지분 100%를 갖고 있어 사실상 국유은행이다. 최대주주는 아니지만 제일은행 45.9% 외환은행 43.2%, 국민은행 9.6% 등은 예금보험공사나 한국은행 등을 통해 지분을 갖고 있다. 또 최근 추진 중인 하나은행과 서울은행의 합병이 성사된다면 하나은행 역시 정부 지분이 포함되게 된다.재정경제부는 이들 은행 중에서 우선적으로 우리은행, 서울은행, 조흥은행의 지분 처분에 관심을 가져 왔다. 지난 1월 재경부가 내놓은 민영화 일정에 따라 우리은행은 공모를 통해 지난 6월24일 지분의 11.8%인 9,000만주를 주식시장에 풀었다.서울은행은 하나은행이 인수하겠다고 나서 현재 매각협상이 진행 중이다. 조흥은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6월에 해외시장에서 15% 내외의 주식을 담보로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한다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산됐다.당시 달러화 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DR발행 대금이 국내로 유입되면가뜩이나 심각한 원화절상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세계경기가 좋지 않고 주식시장 상황도 낙관적이지 않아 제값 받고 발행하기 어렵겠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처럼 지난 1월 재경부가 내놓은 ‘정부보유 은행주식 매각 추진방향’에는 국유은행의 지분 매각 계획이 상세히 나와 있고, 이에 따라 일부 지분이 팔리기도 했다.하지만 국민은행, 외환은행 등에 대해서는 “2003년 시장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추진하되 전략적 투자가가 나타날 경우에는 조기매각도 추진한다”고만 되어 있다. 이처럼 이미 IMF 졸업 이후 정상화된 소위 ‘우량 은행’의 정부보유 지분은 논외였지만 김행장의 발언이 계기가 돼 관심권으로 들어온 것이다.민영화, 안하나 못하나?발행주간사까지 정해놓고 DR발행이 무산됐던 조흥은행 사례처럼 지분처리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이 재경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조흥은행 IR담당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조금만 더 밀어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털어놓았다.그는 또한 “조흥은행에 관심을 갖는 투자가들이 많아 최근 이들이 끊임없이 기업방문을 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볼 때 조흥은행의 상품가치는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금융당국은 최근 조흥은행 DR발행을 재추진키로 하고, 내년 초로 그 시기를 잡고 있다.일반적으로 외국투자가들은 한국의 구조조정 중 은행 부문이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만큼 국내 은행주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높은 편이다. 미국 기반의 대형펀드인 워버그 핀커스 황성진 상무는 “한국 금융업종에 대한 투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은행은 변함없는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는 업종이다”고 말했다.하지만 막상 살 사람을 찾으려면 쉽게 나서지 않는다. 더구나 동북아시아에서 은행을 민영화시켰던 나라들 중 유독 우리나라 은행에만 투자펀드들이 은행 지분을 사갔다. 다른 나라에서는 시티은행과 같은 세계적인 상업은행들이 지분을 인수했다.재경부의 지분 처리 계획은 크게 국내외의 전략적 투자가(경영권을 행사하기보다 주가차익을 목적으로 일정 지분을 취득하는 투자가)에게 매각하거나 국내외 주식시장에서 지분을 파는 방법으로 요약된다. 시장에서 파는 방법으로는 DR, 교환사채(EB) 발행 등 다양한 기법들이 검토되고 있다.하지만 재경부의 고민은 늘 같다. “시장에 풀어놓자니 함부로 공급을 늘려 시장에 충격을 줬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는 것과 “시장에 내놓지 않고 전략적 투자가에게 팔고 싶지만 헐값에 처분할 수 없으니 원매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하소연만 되풀이하고 있다.이와 관련해 최근 KDI가 내놓은 보고서는 매우 시사적이다.이라는 이 보고서는 멕시코와 동유럽 등의 국유은행 민영화 사례를 분석해 반면교사로 삼을 점, 배울 점 등을 설명하고 있다. KDI 김현욱 부연구위원은 “정부 보유 은행지분 처분은 ‘투입된 공적자금의 회수’라는 측면과 ‘은행을 완전히 독립시킨다’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목표가 상충될 때가 많기 때문에 우선 목표를 한 가지로 분명히 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또한 이 보고서에는 ‘먼저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은행의 지분 일부라도 서둘러 민간에 이양하면 주식가치도 올라가 저절로 투입된 공적자금 극대화도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국민은행 등 우량 은행 지분매각에 대해서는 ‘보유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는 식으로 사실상 조기매각을 주장하고 있다.김연구위원은 이와 관련, “우리은행 등 국유은행의 매각을 먼저 처리하고 국민은행과 외환은행 등은 나중에 식으로 양자를 결부시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이 보고서가 제시하는 민영화의 해법은 ‘전략적 투자가에게 경쟁입찰로 파는 방식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공모라는 방법도 끝까지 버리지 말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공모는 일단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해 놓고 나면 턱없이 값을 깎거나 무리한 요구조건을 내세우는 것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다.김연구위원은 “팔겠다고 상품을 내놓았는데 내 것만 사지 않을 때는 이유가 있다”며 “경영판단과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 불안감과 위험성을 안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위험성까지 안고서라도 은행을 사려 한다면 값이라도 싸야 되는데 ‘헐값 매각’으로 국내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을 수 있어 그럴 수도 없으니 굳이 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요컨대 정말로 전략적 투자가에게 매각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불안감을 없애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이와 관련, 시장 관계자들은 “결국 정부의 매각의지가 시험대에 오른 셈”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