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사업 선수치고 안될사업은 36계 줄행랑”

삼성코닝 ‘실패사업 과감한 포기’ 모범사례로 들어 … “같은 실수 반복, 부정비리 용납 못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올해 다섯 차례 사장단회의를 주재했다. 이회장은 이 자리에서 위기를 강조하고 새로운 경영키워드를 제시했다. ‘36계 줄행랑’과 ‘선수치기’ ‘인재확보’가 그것. 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바꿔라’는 인식 전환 주문과는 달리 구체적인 경영방식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IMF 때는 경영진 모두의 눈동자와 표정이 결의에 차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경영진을 보면 모두가 경영성과가 좋다고 자만에 빠진 듯해 더 우려가 된다.”이회장은 최근 가진 전자계열 사장단회의에서 경영진에게 높은 경영성과에 따른 격려 대신 이같이 꾸짖었다. 삼성 전자계열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이 위기의식을 강조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아주 셌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이회장은 특히 “삼성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지만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질시와 질투하는 분위기 때문에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며 “지금 잘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고, 5~10년 후 무엇을 할 것인지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이회장은 위기의 돌파구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36계 줄행랑’과 ‘선수치기’를 들었다.36계 줄행랑 쳐라“안되는 사업을 끌어안지 말고 빨리 버려라. 나는 새로운 사업을 했다가 수조원을 날려도 나무란 적이 없다. 실패에서 배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 ‘36계 줄행랑’이라는 게 있다. 이는 안될 사업은 일찍 포기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면 반드시 문책한다. 부정비리는 금액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라도 용서하지 않는다.”이회장이 94년 자동차사업에 진출했다가 포기한 쓰라린 경험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삼성 관계자는 “자동차사업을 진출 4년 만인 98년 사업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 재빨리 포기해 IMF를 극복했던 것도 한 예”라고 설명했다.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회장이 그 사례로 든 삼성코닝. 이회장은 “삼성코닝의 연구소에서는 한 직원이 중장기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다가 3년 만에 포기하자 이 직원을 문책하기보다 용기를 북돋워 줬다”며 이 같은 사고방식을 경영진이 가질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선수를 쳐라“12년 전 왜 남의 뒤만 따라다니느냐고 질책한 적이 있다. 요즘 홈시어터 시장을 보면 경쟁사들은 이익을 내며 감가상각까지 하고 있는데 지금 들어가서 되겠느냐. (사업이) 될 만한 것들은 남들보다 선수를 쳐야 한다.”이회장은 삼성전자가 4월 사장단회의에서 ‘홈시어터’ 시장에 적극 진출키로 했다는 보고를 받자 이같이 지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 이회장은 “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바꾸라고 한 것은 사고의 전환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며 “사고를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안돼 항상 남의 뒤만 따라가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는 후문이다.우수인재를 확보하라한편 이회장이 올 들어 가장 입에 많이 올린 말은 ‘인재확보’다. 이회장은 6월 열린 인재전략 사장단회의에서 “10년 후를 생각하라고 했더니 새로운 사업들만 잔뜩 쏟아냈다”며 “미래를 이끌 인재를 확보하라는 얘기였지 누가 신규사업을 보고하라고 그랬느냐”고 질타했다고 한다.이는 진대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과 같은 핵심인재들을 회사에 많이 두면 이들이 미래를 책임지고 키워나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삼성이 최근 금융계열사들의 봉급을 업계 최고수준으로 올린 것도 이회장의 인재확보 역설에 따른 것이다. 이회장의 인재 잡아 두기는 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이회장은 이학수 비서실 차장(현 사장)에게 직원들의 봉급을 올려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그룹 재무상황을 파악한 이차장은 임금을 올릴 경우 그룹이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것.그러자 이회장은 “지금 당장 급여 인상으로 그룹에 부담이 되겠지만 인재들이 회사를 키워 적자를 메우는 것은 물론 엄청난 흑자를 가져다줄 것”이라며 즉각적인 인상을 지시했다고 한다.돋보기 / 달라진 삼성 사장단회의이회장 송곳질문에 사장들 ‘초긴장’올 봄에 열린 삼성 전자계열 사장단회의.모 계열사 사장이 회사현황과 향후 계획을 읽어 내려갔다. 사장의 말이 끝나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브리핑이 못마땅한 투로 이렇게 지적했다.“회사현황 수치는 이미 여러 차례 보고가 올라와서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신문에도 많이 나지 않았는가.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10년 후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발표해야 한다.”회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계열사 사장들은 자신들이 갖고 왔던 현황보고서를 접고 마땅한 ‘신수종 사업’을 머리에 떠올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회장은 각 계열사 사장들이 현황 및 비전을 발표하고 나면 정곡을 찌르듯 지적해 발표자들을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올 들어 이회장이 주재한 사장단회의는 다섯 번. 예년에 비해 한 번이 많다. 보통 삼성의 사장단회의는 전자계열 및 비전자계열이 1년에 각각 두 번(봄ㆍ가을)씩 가져 모두 네 번 열린다. 하지만 올해는 6월에 인재전략 사장단회의를 한 번 더 개최했다. 이는 이회장이 봄에 있었던 전자계열 및 비전자계열의 사장단회의에서 신통치 않은 얘기만 나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올 들어 삼성 사장단회의는 계열사 사장들이 5~10분 정도 발표하면 사이사이에 이회장이 코멘트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사장)이 이회장의 지적들을 정리하면 끝나는 수순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이들 회의는 적게는 4~5시간에서 10시간 가까이 걸렸다는 게 삼성측의 설명. 지난 4월에 열린 삼성전자계열 사장단회의는 앞서 디지털TV와 홈시어터 등의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둘러보고 시작됐다.지난 93년 이회장이 ‘신경영’을 부르짖으며 일본 도쿄,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사장단회의를 열었을 때는 거의 이회장이 혼자서 사안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삼성 관계자는 “최근에는 이회장이 상당부분 ‘경청’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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