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높은 연봉을 줘도 복리후생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회사로는 이직하지 않겠습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김태희 대리(31)의 말이다.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복리후생제도가 진일보하고 있다. 70년대에는 급식과 피복, 기숙사를 제공하는 ‘생계보조형’이 주류를 이뤘고, 80년대에는 기념일 선물과 통근버스, 학자금 위주의 ‘급여보전형’ 위주였다. 90년대 접어들면서 의료비와 여가생활비, 자기계발비를 지원하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실질임금까지 줄어든 IMF 시기에는 복리후생 항목이 폐지되는 경우도 발생했다.근로자별 다양한 복리욕구 반영21세기로 접어든 현재,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선택적 복리후생제도’가 부각되고 있다. 선택적 복리후생제도(Flexible Benefits System)란 임직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예산선 내에서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맞도록 복리후생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이다.‘카페테리아 플랜’(Cafeteria Benefits Plans)으로 불리기도 한다. 손님이 직접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먹는 식당인 ‘카페테리아’처럼 원하는 복리후생 항목을 선택한다는 의미에서다. 자녀의 학자금이나 주택자금, 건강진단비, 생명보험, 자동차보험 등 전통적 항목에 그치지 않는다.스포츠센터와 골프장등록비, 한약, 치과 보철, 탁아 등에 복리후생비를 이용할 수도 있다. 자기계발을 위한 학원, 도서구입, 잡지 정기구독 등의 항목도 있다. 휴양시설 이용비와 영화공연 관람비용, 기념일 선물비, 국내외 여행경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과거 복리후생제도는 임직원이 유사한 복리욕구를 지닌 집단임을 전제했었다.그러나 선택적 복리후생제도에는 근로자의 다양한 복리욕구를 획일적 제도로 총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있다.1970년대 초반 미국 기업인 TRW사와 ETS사가 처음으로 선택적 복리후생제를 실시했다. 현재 경제주간지 선정 미국 500대 기업의 75% 이상이 활용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돼 있다.국내에서는 97년 한국IBM이 처음으로 이 제도를 도입한 후 제일제당, 동양제과, LG유통, LG카드, 삼성생명, KTF 등 대기업과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이 이 제도를 속속 도입했다. BAT코리아와 나이키스포츠코리아 등 외국계 기업과 한글과컴퓨터 등 벤처회사까지 포함해 국내 20~30여개 기업이 이 제도를 시행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내년부터 포스코 등 사기업들과 경찰청, 기획예산처, 중앙인사위 원회 등 3개 정부기관도 실시할 예정이다. 선택적 복리후생제도에 대한 정부의 적극성으로 2004년에는 모든 정부부처와 산하기관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최근 정부가 ‘근로자 복지증진 기본계획’을 추진해나갈 것을 공언하면서 이를 활용하는 기업의 수가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이 제도를 적용하는 회사마다 세부방침은 다르다. 연간 102억원의 비용을 들여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인 포스코는 직급이나 근속연수에 따른 차등 없이 전직원에게 연 49만원(상주 직원 기준, 교대 58만1,000원)의 선택적 복리후생비를 지원한다.반면 한국가스공사와 동양제과는 직급과 근속연수, 부양가족을 기준으로 차등지급한다. 한국IBM에는 휴가와 현금을 맞바꿀 수 있는 현금선택형이 있으며, LG계열사는 주유비를 항목에 포함시켰다. 선택적 복리후생비의 한도액은 기업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연간평균 50만원 선이다.선택적 복리후생 도입 기업, 세제 혜택 필요그러나 선택적 복리후생제도를 도입한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에 이 제도는 그림의 떡일 수 있다. 비용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과세로 처리되는 ‘사내근로복지기금’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기업의 상당수는 대기업이다. 반면 이 기금을 별도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중소기업도 태반이다.기금을 이용해 근로자에게 복지혜택을 주는 기업에는 세금을 추징하지 않지만 이 기금 자체를 보유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세금 때문에 선택적 복리후생제도를 도입하지 못하는 기업이 발생하게 되는 것.심경우 노동부 근로기준국 근로복지과 과장은 “사내근로복지기금 중 50%는 정립하고 50%는 복리후생비용으로 사용하도록 돼 있다”며 “기금의 한도를 높이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과장은 “선택적 복리후생제도를 장려하기 위해 도입하는 기업에 세제 지원책을 주도록 재경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유규창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복리후생부문은 비과세로 처리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과세방침을 고수한다”며 “선택적 복리후생을 도입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교수는 “미국과는 달리 복리후생비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학자금과 주택자금을 항목에 포함시키는 한국의 기업 환경도 검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돋보기 도입 사례분석/동양제과복리포인트 따라 자율 사용선택적 복리후생제도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연령에 따라 다른 삶의 모습을 현실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연령층에 속해 있는 동양제과 직원 2명의 실제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양제과는 근로자의 연령과 근속기간, 부양가족수와 더불어 개인업적 평가결과에 따라 복리포인트를 차등지급한다.동양제과 부장으로 재직 중인 40대 가모씨는 올해 회사로부터 260포인트의 복리포인트를 받았다. 가씨는 대학생 1명, 고등학생 1명을 두고 있어 포인트 중 절반에 가까운 142포인트인 426만원을 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A항목을 선택했다.지급 포인트는 A항목으로 사용할 경우 1포인트당 3만원(142포인트×3만원=426만원)이다. 치료비는 공통항목으로 회사가 가족까지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와 함께 가씨는 나머지 포인트에 해당하는 118포인트는 문화, 레저, 각종 보험상품 등에 활용할 수 있는 B항목을 선택했다.선택항목 B는 1포인트당 1,000원이다. 배우자 생일선물에 50포인트(5만원), 운동화 구입에 68포인트(6만8,000원)를 사용해 가씨에게 지급된 260포인트를 모두 사용했다. 가씨가 포인트를 통해 회사로부터 총 지원받은 금액은 437만원이었다.한편 20대 사원인 나씨는 아직 미혼인 관계로 회사에서 부여받은 복지포인트를 전부 B항목(1포인트당 1,000원)을 선택해 사용했다. 치료비와 서클활동비 등은 포인트에 관계없이 복지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통항목이었다. 그는 “학자금 지원 등은 해당사항이 없는 관계로 문화, 레저, 선물 등에 사용할 수 있는 B항목을 선택했다”고 말했다.나씨가 회사로부터 받은 복지포인트는 총 200포인트. 이중 B씨는 올 1년간 자기계발을 위한 도서구입에 29.5포인트, 영화관람에 14포인트, 콘도시설 이용에 90포인트, 운동복 구입에 46.5포인트, 선물로 20포인트를 사용해 자기에게 부여된 200포인트 모두 사용했다. 사용한 금액은 20만원(200포인트×1,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