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중심 지하경제 양성화 의도 ‘다분’

북한이 획기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12월1일부터 외화결제 기본통화를 미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변경하겠다는 내용이다.북한의 외환제도는 미 달러화를 외화거래의 기본통화로 삼아 ‘1달러=2.2원’을 중심환율로 하는 고정환율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문제는 북한의 경제규모에 비해 중심환율을 너무 높게 설정함에 따라 고평가 문제에 시달리면서 의도했던 대로 대외거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이 나진ㆍ선봉지구 등 경제특구 정책을 실시하면서 고평가된 북한의 원화를 현실화시켰다. 대부분 외화거래에 있어서는 종전처럼 ‘1달러=2.2원’의 고정환율제를 유지했으나 경제특구에 있어서는 대외거래를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1달러=150원’으로 현실화시키는 이중환율제도로 변경했다.이론적으로 한 나라에서 이중환율제를 실시할 경우 반드시 환투기가 발생한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중환율제를 추진한 이후 공산당 간부를 중심으로 환투기가 심하게 발생했다. 이런 점을 시정하기 위해 지난 7월1일부터 실시된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환율제도를 ‘1달러=150원’으로 일원화시켜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12월1일부터 북한이 외화거래 기본통화를 미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할 경우 크게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예상된다. 하나는 북한 내 모든 달러화 결제계좌는 유로화 결제계좌로 변경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평양과 북한 내 모든 외국상점에 진열된 외국상품의 가격을 유로화로 표시해야 한다. 그동안 외화상품의 가격을 미 달러화로 표시해 왔다.관심을 끄는 것은 외화거래 기본통화를 유로화로 변경할 경우 유로화와 북한 돈인 ‘원화’의 환율은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조선무역은행 대표가 국제외환시장에서 형성되는 달러/유로 환율을 감안해 결정하겠다고 말한 점을 감안해 볼 때 ‘1유로=150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들어 국제외환시장에서는 ‘1유로=1달러’의 등가수준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어떻게 보면 북한이 유지하고 있는 대외거래 체계나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감안할 때 이번 조치는 매우 획기적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현시점에서 왜 이런 구상을 했을까.외형상으로는 최근 들어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부시행정부의 대북한 정책에 대항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북한의 서운한 감정을 달러화 표기 포기로 보여준다는 것이 이들 시각의 근거다. 과거의 경우 국제사회에서 이런 사례는 없었다.더욱이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대항하려는 세력으로 유럽연합(EU)을 꼽고 유로화를 채택하는 것을 계기로 EU와의 경제의존도를 높여 나가겠다는 것이 북한이 구상하고 있는 중장기적인 전략이다. 특히 동유럽과 러시아 일부 공화국들이 오는 2004년 5월까지 EU에 가입하는 계획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풀이된다.물론 이 같은 견해대로 북한이 외화거래 기본통화로 달러화를 포기하는 데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나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지하경제를 양성화시키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미 달러화는 90년대 들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화폐가 됐다. 자연스럽게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공산당 간부들도 부의 축적수단으로 달러화를 선호함에 따라 지하경제 규모가 커졌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지하경제 규모가 5억∼1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결국 외화거래 기본통화를 미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한다는 것을 일종의 화폐개혁에 해당한다.문제는 북한이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느냐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 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오히려 부작용이 커 일정한 시점이 지난 후에는 외화거래 기본통화가 다시 유로화에서 미 달러화로 환원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또 유로화를 외화거래의 기본통화로 사용할 경우 대외거래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북한이 대외거래에서 유로화를 요구할 경우 이미 달러화로 익숙해진 거래체계가 흐트러지면서 대외거래 성사율이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외화난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더욱이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같은 국제금융기구 가입이 사실상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들 기구의 가입도 요원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들 기구가 제공하는 자금도 지원받지 못하게 된다.참고로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게 되면 가장 손쉽게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빈곤퇴치와 성장지원기금(PRGF), 세계은행으로부터 국제개발협회(IDA) 자금, 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는 아시아개발기금(ADF) 등이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면 지원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자금들이다.북한이 외화거래 기본통화로 달러화를 포기할 경우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계획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우리 정부는 북한개발과 남북경협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특별신탁기금(Special Trust Fund)을 조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방침이나 이 문제 역시 미국의 입장이 관건이다. 물론 민간차원에서 거론되고 있는 북한개발에 필요한 지원방안도 어려워진다.북한 내부적으로는 과연 얼마만큼 미 달러화를 환전할 것인가 하는 점도 의문시된다. 미 달러화가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미 달러화를 내놓겠지만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깊숙한 곳에 숨겨놓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 화폐개혁을 단행한 국가에서 흔하게 발생했다.한편 북한이 외화결제통화를 미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변경하면 국내 기업들의 대북한 거래와 앞으로 전개될 남북경협에도 상당한 차질이 예상된다.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북한과의 거래에서 미 달러화를 기본통화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국제외환시장에서는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같은 거래라면 그만큼 대북한 거래에 있어서 국내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외환비용이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국내 기업들이 대북한 거래에 있어서 환위험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schan@hankyun 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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