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 공대 전폭 재정지원 명문대로 육성

일본의 대학들 앞에 던져진 2002년 최고의 화두는 ‘서바이벌’(생존)과 이를 위한 ‘체인지’(변화)다. 해마다 뒤로 밀려나는 국가경쟁력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처럼 대학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본 안팎의 비난은 학교 관계자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교육의 질 향상에 소매를 걷어붙인 일본 정부는 국공립대학에도 시장원리를 도입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교를 퇴출시키겠다고 공언하지만 언론과 일반 국민들의 불만에 찬 시선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2002년 노벨상수상자를 2명(화학ㆍ물리학)이나 배출해 나라 전체가 잔칫집 분위기에 휩싸였음에도 불구, 일본 언론은 대학들이 학생수 감소와 재정난의 이중고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전제로 볼 때 일본 나고야시에 자리잡은 도요타공업대학은 일본 대학들이 안고 있는 고민과 완전히 동떨어진 길을 달리고 있다. 오히려 다른 대학들이 앓고 있는 중병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초일류 기업으로부터의 든든한 재정지원과 실학에 바탕을 둔 학풍, 그리고 교육과 학문연구의 독립성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학교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교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대학은 일본 최강의 기업 도요타자동차가 1981년 세운 단과대학이다. 학부 정원 320명에 석ㆍ박사과정의 대학원 정원 84명의 미니학교다. 이 학교는 나고야시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요타자동차의 옛 중앙연구소 부지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연구소 부지를 캠퍼스와 학교 건물로 쓰고 있는 까닭에 학교 외관은 수수하기 이를 데 없다. 학생수가 많지 않은데다 설립역사도 20년을 넘긴 데 불과해 속사정을 모르는 외국인들로부터 관심과 눈길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하지만 이 대학의 실력과 강점은 전문조사기관들이 발표하는 각종 수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발행한 ‘대학랭킹 2003’에서 도요타공업대학은 지난 94년부터 2001년까지 특허 취득 건수에서 일본 전국 10위(81건), 특허 공개 건수 8위(67건)를 각각 차지했다.연구활동을 뒷받침할 외부지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끌어들였느냐를 나타내는 교원 1인당 외부자금에서는 도쿄대와 도쿄공업대에 이어 전국 3위에 올랐다. 96년부터 2001년까지의 5년 동안을 기준으로 한 입학지원자수의 증가폭에서는 3.6배로 일본 전체 대학들 중 톱을 달렸다.직장에 근무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문을 연 이 대학은 설립된 지 12년 만인 93년부터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95년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설치했다.일본 언론과 학교측은 박사과정 설치를 계기로 도입한 주담당교수제도가 급성장의 기폭제가 됐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제도는 학교측이 연구분야를 지정한 후 국내외에서 주담당자가 될 교수를 공개 모집한다. 선발된 교수에게는 연구실 설치비로 최대 1억엔을 지급하는 한편 연구비도 통상 연간 1,000만엔을 보장한다. 연구보조인력도 3~5명이 따라붙는다. 한 마디로 돈, 인력, 시설 등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연구에만 매달려 좋은 성과를 내라는 암시다.수소의 움직임을 검출하는 수소현미경을 세계 최초로 실용화해 일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우에다 가쓰유키 교수(62)는 이 제도를 잘 이용해 세계적 명성을 높이고 있는 대표적 학자다.“다른 대학에 근무하고 있다면 대당 5,000만엔 이상 들어가는 수소현미경 개발을 진행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옮겨온 후 돈, 설비 걱정을 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어 만족스럽습니다.”오사카대학에서 근무하다 40대1의 좁은 문을 뚫고 도요타공업대로 옮겨온 그는 “도쿄대 교수들도 깜짝 놀랄 정도의 최신설비와 훌륭한 인력의 도움을 받고 있다”며 “연구속도도 상당히 빨라졌다”고 흡족해하고 있다.그러나 무턱대고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측은 5년마다 실적을 평가해 연구분야의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성과가 미흡하다고 판단되는 주담당자는 미련없이 교체한다.지난 4월에는 전체 8명의 주담당자 중 2명이 탈락해 일반 교수로 직위가 바뀌었다. 학문의 질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거금을 아낌없이 쓰지만 헛된 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이와 관련, 일본 언론은 낭비를 배격하고 부품도 필요할 때 꼭 필요한 양만큼 조달해 사용하는 도요타자동차의 ‘저스트 인 타임’(JIT) 생산방식이 연구활동에도 은연중 스며든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도요타자동차 출신으로 대학 살림을 맡고 있는 기시다 도시히코 상무 역시 “의식은 하지 않지만 도요타의 경영방식이 학교운영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완벽한 현장주의 학습으로 ‘인기’도요타공업대학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교육과정에서의 완벽한 현장주의다. 선반과 방전가공기 등 공작기계를 이용한 실습은 학생들에게 필수 이수과목이다. 1학년과 3학년 때는 약 1개월씩 제조업체들의 생산현장에서 기술부문의 연수를 거쳐야 한다. 기자가 방문한 토요일에도 학생들은 실습실에서 기계와 싸우고 있었다. 반도체 클린룸 앞에는 학생들이 실습과정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풍부한 현장실습과 체계적 이론교육을 거친 이상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는 탄탄대로다. 경제상황 악화로 일본 기업들의 취업문이 바늘구멍으로 변했다지만 도요타공업대학의 취업률은 100%다. 설립 모체인 도요타자동차뿐만 아니라 혼다 등 경쟁기업과 마쓰시타전기 등 일류회사에 보란 듯이 뚫고 들어간다.하지만 일본 언론이 주목하는 이 대학의 진짜 강점은 재정운영 방식이다. 살림살이에서 이 학교는 도요타자동차로부터 절대적 도움을 받고 있다. 2001년의 경우 32억엔의 연간 운영예산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14억엔이 도요타로부터 들어왔다.도요타가 이렇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니 학부모와 학생들의 짐이 홀가분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낸 등록금은 2002년 78만엔으로 국립대학과 같았다. 일반 이공계 사립대학의 160만엔에 비해서는 2분의 1 수준에도 못미쳤다. 학생들이 누리는 혜택은 등록금만이 아니다. 장학금 지급률에서도 이 학교는 평균 52%로 사립대학 전체 평균 14%를 네 배 가까이 웃돌고 있다. 학비는 국립대 수준으로 받으면서 교육의 질은 민간기업이 제공하는 일류서비스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도요타의 의지가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설립 때부터 이 학교에 계속 몸담아온 나가사와 미쓰루 학장(78)은 “도요타라는 안정된 기반이 존재한 덕에 마음먹은 대로 학생들을 키우고 연구성과를 꽃피울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가사와 학장은 그러나 “돈은 낼지언정 말참견은 하지 않는 것이 도요타의 특징이었다”고 밝혀 설립 모체인 도요타와 학문의 자유는 별개로 존재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일본 언론은 모기업의 의지와 경영방식에 뿌리를 두고 세워진 대학의 발전이야말로 재정적 지원과 함께 학문적 독자성을 얼마나 최대한 확보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단기간에 연구, 교육의 질과 위상에서 명문교로 발돋움한 도요타공업대학의 사례를 본보기로 지적, 이 대학의 쾌주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 관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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