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부양·경기회복 위한 ‘궁여지책’

12월 들어 국제외환시장, 특히 엔/달러 환율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올 9월 이후 엔/달러 환율은 이상한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달러당 120∼123엔 범위에서 안정된 흐름이 지속됐다. 엔화 환율 이외에 다른 통화 환율도 비슷한 흐름이 유지됐다. 이에 따라 국제금융시장의 관심은 한동안 증시에 쏠리면서 환율 움직임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두 달 이상 지속된 이런 흐름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12월 들어서부터다. 느닷없이 일본 시즈오카 재무상의 엔/달러 환율의 적정수준이 지금보다 약 30엔 정도가 높은 150∼160엔이라는 발언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다시 말해 일본경제가 지금의 침체국면과 디플레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엔화가치는 적정수준으로 환원돼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이런 발언으로 국제외환시장에 일파만파영향을 미치자 시즈오카 재무상은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지만 곧이어 구로다 재무부 차관보가 엔저를 용인하는 발언으로 파장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올해 초에 이어 엔저 정책을 재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현시점에서 일본 경제각료들이 잇달아 엔저 정책을 추진할 뜻을 내비치는 것은 그만큼 일본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침체된 증시와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제한돼 있는 점이 다시 한 번 엔저 정책을 재구상하는 가장 큰 배경이다.현재 일본의 콜금리는 ‘제로’ 수준이다. 침체된 증시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통화정책이 무력화된 단계다. 더욱이 금리를 내린다 하더라도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있어 효과가 거의 없다. 최근 들어서는 일본은행의 하야미 총재까지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통화정책이 표류하고 있다.재정정책도 사정은 통화정책과 마찬가지다. 지난 9월 말 현재 일본의 재정수지 적자는 국민소득(GDP)의 11%, 국가채무는 GDP의 132%에 달하고 있다.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결국 일본정부의 재정사정(Cash Flow)이 이렇게 악화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 경기와 증시부양에 나설 수 없다.일본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리는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문제도 그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오히려 부실채권 규모는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후원하에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다케나카 헤이조의 부실채권 처리방안도 정치적인 저항에 밀려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엔저 정책은 지난해 이맘때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이때도 인접국들의 저항에 밀려 포기했던 엔저 정책을 1년 후에 또다시 들고 나오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일본경제가 어렵고 정책수단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증시와 경기를 회복시킬 책임이 있는 일본경제 각료로서는 일종의 궁여지책으로 엔저 정책을 재추진할 뜻을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문제는 엔저 정책을 재추진할 경우 일본 정부가 의도하고 있는 증시와 경기부양에는 얼마큼 효과를 거둘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나 관건은 엔저 정책에 따라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수출이 일본 GDP에서 차지하는 기여도가 높아야 한다.불행하게도 일본 국민소득(GDP)의 총수요 항목별 기여도를 산출해 보면 수출은 9%밖에 안된다. 일본경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수출이 아니라 GDP 기여도가 66%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살아나야 가능하다.다시 말해 일본 경제구조에 있어서 우리와 달리 수출이 살아나면 경기가 미동만 될 뿐이지 본격적인 일본경기 회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민간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문제는 일본국민들의 민간소비는 ‘좀비경제’(Zoombi Economy)라 불릴 만큼 어떤 신호(Signal)를 준다 하더라도 좀처럼 반응하지 않고 있다.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엔저 정책을 추진할 경우 일본 내 자금과 기업의 해외이탈을 촉진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는 자본과 제조업의 양대 공동화를 심화시켜 일본경제가 더욱 침체되는 자충수가 될 위험이 있다. 물론 외국기업과 외국자본들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사요나라 닛폰’이란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일본경제를 외면한 지 오래다.엔저 정책은 인접국에도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엔저 정책을 추진해 개선된 경쟁력은 자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신 한국을 비롯한 인접국들의 경쟁력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어떤 나라가 자국의 통화가치를 내려 경기와 증시를 부양하는 정책을 ‘근린 궁핍화 정책’이라 부른다.만약 이런 특성을 외면하고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엔저 정책을 계속해서 고집할 경우 인접국과의 통화마찰과 통화전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 인접국들이 일본의 엔저 정책에 따라 경쟁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엔화 가치를 내린 폭만큼 인접국들도 자국의 통화가치를 내려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본의 엔저 정책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무엇보다 수출에 악영향이 우려된다.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흔히 우리 수출구조를 엔/달러 환율에 의존하는 ‘천수답 구조’라 부른다. 엔화가 강세가 될 때는 우리 수출과 경기가 살아나고 반대로 엔화가 약세가 되면 수출과 경기가 둔화되기 때문이다.동일한 맥락이 될지 모르지만 엔저 정책으로 원화 환율에 미칠 영향도 우려된다.다행인 것은 이번에 엔저 정책을 추진할 경우 일본정부가 의도하는 증시와 경기부양 효과보다 일본경제의 추가 침체, 인접국 등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올해 초의 경험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는 엔/달러 환율이 현 수준보다 크게 높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엔/달러 환율의 상승세가 제한된다면 원/달러 환율도 지금보다 크게 상승할 가능성은 낮다. 연말을 앞두고 환율에 고민하는 기업들이나 해외 유학생을 둔 부모들은 이번에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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