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부자아빠 부자엄마 될래요”

서울 송파구 송파동에 사는 주부 오후덕씨(36)는 얼마전 과감한 결정을 한 가지 내렸다. 이번 겨울방학에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정모군(12)에게 해외영어연수 대신 경제교육을 시키기로 한 것이다.오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방학 때마다 정군을 호주에 보내 영어연수를 시켰다. 그러나 최근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고민 끝에 정군을 어린이 경제캠프에 보내기로 했다. ‘영어교육도 중요하지만 경제교육이야말로 어릴 적부터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다.오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면서 어린이 경제교육은 하나의 신드롬으로 부상했다. 서점마다 어린이 경제교육을 주제로 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방학을 이용한 어린이 경제캠프들은 조기에 접수가 마감되기 일쑤다.이 같은 조기 경제교육 붐은 유치원에까지 파급됐다. 서울 송파구의 Y유치원은 지난 9월부터 유아경제프로그램인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경제마을’을 도입, 시행하고 있다. 바탕색깔에 따라 여러 경제영역에서 활동하며 체험하게 한 이 프로그램은 유아들의 눈높이에 맞춰 한 전문업체가 개발했는데 어머니용 3개월, 유아용 9개월의 1년 코스다.IMF 이후 조기경제교육 공감대 형성조기경제교육 신드롬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최근 2~3년 사이에 자녀들의 경제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은 꾸준히 높아져 왔다. 여기에는 을 비롯한 언론에서 조기경제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한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IMF 이후 경제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켜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공감이 형성된 데 따른 것이다.지난여름 한 사설업체가 운영한 ‘주니어CEO 캠프’에 초등학교 4학년인 자녀를 보냈던 박미연씨(38ㆍ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는 “요즘 학부모들의 새로운 화두는 경제교육”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번 겨울방학에도 경제 관련 캠프와 교육 프로그램에 자녀를 참가시킬 예정이다.이 같은 신드롬은 관련 시장에서도 확인된다. 서울 강남의 일부 사설학원들은 초중교생을 대상으로 한 경제교육시장에 뛰어들거나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가정을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전문적으로 시키는 방문교육사업도 등장했다. 이미 많은 업체들이 외국의 유명회사와 제휴를 맺고 경쟁적으로 관련 교육 프로그램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출판계에서는 어린이 경제를 주제로 다룬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해 출판계의 테마는 어린이 경제가 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웬만한 대형 서점이면 어린이 경제서적 코너가 마련돼 있을 정도다.인터넷에서는 어린이 경제교육 전문 사이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관련 온라인게임도 많이 보급됐다. 몇몇 신문사와 전문업체에서는 방학 때마다 어린이 경제캠프나 비즈니스스쿨을 경쟁적으로 개최하고 있다.체계화되면 국제경쟁력 높이는 데 도움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말한다. 박원배 어린이경제 사장은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제대로 시켰다면 시장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IMF도 오지 않았고 최근의 가계부채나 신용불량자 양산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어린이 경제교육이 확산되면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창업이나 국제무역에 관한 마인드를 일깨워주고 CEO의 자질과 소양을 어릴 적부터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직접적으로 높이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아직 국내의 조기경제교육은 제도권 밖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그나마 걸음마 단계다.“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교육과정에서 체계적인 경제교육을 해 왔고, 수많은 비정부기구(NGO)와 사설업체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경제교육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부를 한손에 쥐고 흔든다는 유태인들의 저력에는 탈무드를 기반으로 한 조기경제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최근까지 어린이 경제교육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어린이 경제교육 전문기관인 아이빛연구소 황선하 사장은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 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현재 국내 초등학교 교과과정에는 경제교육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용돈기입장 기록법을 가르치거나 은행견학을 과제로 내주는 수준에 그친다. “유치원 때부터 도넛을 만들며 생산과 협업, 분업에 대해 익히고 초등학교 때 창업이나 모의주식투자 게임을 실습하는 미국 어린이들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습니까.” 황사장의 비판이다.그러나 어린이 경제교육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도록 준비해야 할 교육인적자원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직 담당부서나 담당직원조차 지정하지 않고 있다. 재정경제부가 경제관련 플래시 애니매이션 교육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금융감독원이 금융교육활성화연구팀을 설치했을 뿐이다.이와 관련, 이윤우 KDI 연구원은 “초등학교 사회과 과목에 포함돼 있는 경제과목을 따로 떼어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연구원은 특히 “이론주입식이 아닌 생활 속에서 원리를 체득하는 방향으로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한편 일부에서는 최근의 조기경제교육 신드롬이 ‘우리아이 백만장자 만들기’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장수명 한국교육개발원 인적자원연구위원은 “경제교육은 백만장자 만들기가 아니다”며 “돈에 대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심어주는 게 어린이 경제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식투자, 은행거래 등 단편적인 경제교육 프로그램들은 자칫 ‘수익만 내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어린이 경제교육을 전담할 교사의 양성이나 프로그램 개발 등도 숙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기존 교사를 재교육하는 방법보다 전문교사제를 도입하고 한국 실정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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