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기업만 살아남 는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3년.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 정부는 신경제 5개년 개혁을 발표하면서 30대 재벌에 대한 출자규제 및 상호지급보증제한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30~50위권 그룹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견그룹의 대약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97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기 전 무리하게 팽창을 시도했던 중견그룹들이 부도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이들의 승승장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97년 말 IMF와 함께 등장한 ‘국민의 정부’ 시대에는 그동안 재계 기둥으로 여겨져 왔던 30대 그룹마저 급격한 해체의 길을 걸었다. 특히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5대 그룹의 지도마저 바꿔놓았다. 재계 3위의 대우는 몰락하고, 1위의 현대는 현대와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으로 쪼개지는 엄청난 지각변동을 맞았다. 더욱이 포스코 등 공기업이 대거 민영화되기 시작하면서 재계지도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젊은 세대가 세상을 바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대의 재계지도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최근 새 정부 10대 국정과제를 정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시스템을 위한 재벌개혁에 힘쓸 것임을 내비쳤다. 금융사 계열분리청구제, 상속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도입과 함께 재벌금융회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에 대한 부당한 의결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할 계획이다. 인수위는 혁명과 같은 급작스러운 조치는 없을 것임을 밝혔지만 재계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재벌그룹의 계열사들을 인위적으로 산산이 흩어놓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사실 재벌그룹들은 IMF 이후 계열사들에 대한 컨트롤 기능이 크게 약화됐다. 삼성 관계자는 “계열사들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며 “수익성 있는 사업이면 계열사들끼리 영역을 침범하면서까지 경쟁을 벌이는 지경”이라고 귀띔했다. LG 관계자는 “그룹분할이 가속화되면서 그동안 많던 기업들이 각각 제 길을 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그룹 계열사들이 홀로서기에 나서 ‘무늬만 같을 뿐 남남의 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그룹단위의 재벌시대가 가고 개별 대기업 시대가 정착돼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이 같은 변화는 가 시가총액, 매출액, 순이익을 주요지표로 선정하는 100대 기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5월 선정한 ‘2002년 한국 100대기업’(본지 337호ㆍ2002년 5월20일자)에 따르면 100위 안에 든 10대 재벌그룹들의 계열사들은 34개에 불과했다.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기업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한국전력공사, 현대자동차, KT, 포스코, 국민은행, SK텔레콤, LG전자, 기아자동차, 조흥은행 등 주요업종의 대표주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이와 함께 재벌그룹에 속하지 않은 기업들이 2001년에 이어 지난해 재벌 계열사들을 밀어내고 대거 진입하는 등 재계에 새바람을 예고해 왔다.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관계자는 “노당선자가 말한 대기업 우선정책이란 가 뽑은 100대 기업과 같은 투명하고 튼튼한 기업들을 국내 간판기업으로 키워내는 것”이라며 “경제시스템 개혁이란 이런 기업들에 대해 오너들의 ‘쓸데없는 입김’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와의 인터뷰(34~35쪽 참조)에서 “재벌정책의 핵심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진정으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해 우리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렇다고 정부나 감독기관이 나서서 구조조정본부 해체를 유도하거나 충격적인 방법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재계는 기업분할을 통해서는 슬림화를, M&A를 통해서는 전문화 및 대형화를 꾀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맞서기 위환 처절한 생존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이와 함께 재계는 일단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 애쓰고 있다. 젊은 인재들로 하여금 재계의 분위기를 신선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다. 일각에서는 오너 중심의 지배구조를 굳히겠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하지만 삼성 및 현대 관계자들은 “삼성전자 및 현대자동차에 능력 없는 오너들을 일선에 배치하면 50%가 넘는 외국인 주주들이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 포드, 일본 도요타 등 세계적인 기업들조차 능력 있는 오너들을 다시 경영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을 강조한다.윤리경영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스스로 투명지수를 높이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글로벌기업에 맞서 대적할 기업들을 키우고 있는 것도 재계의 큰 변화다. 앞으로는 이들 기업이 재계는 물론 국가경제의 기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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