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버리고 경영통합으로 한집살림

‘살기 위해서는 본업도 버린다. 돈벌이가 안된다면 할 수 없다.’지난 1월7일 오후, 세계 최강의 정밀광학기기 왕국인 일본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귀를 의심할 만한 일이 깜짝쇼처럼 벌어졌다. 한국에도 브랜드 네임이 잘 알려진 대형 필름, 카메라회사인 코니카와 미놀타가 경영통합 방식으로 한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경제뉴스를 1면 머리기사로 주로 올리는 은 말할 것도 없고, 등 거의 모든 종합지들이 두 회사의 짝짓기를 석간 톱뉴스로 보도했다. 방송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후 시간대의 정시뉴스는 물론 심야뉴스 프로그램에서도 가장 화끈한 대접을 받은 것이 두 회사의 통합소식이었다.기업들의 재편, 통합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곳이 일본 산업계이지만 코니카와 미놀타의 한집살림 발표는 신년 벽두의 빅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정밀광학기기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물론 지금까지의 회사 내력에서도 두 업체는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대중적 인지도를 지니고 있어서였다.1873년에 창립된 코니카는 도쿄 신주쿠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자본금 375억엔, 2001년 매출 5,395억엔(2002년 3월 결산)에 110억엔의 순익을 올린 회사다. 매출랭킹에서 캐논, 후지사진필름, 리코에 이어 일본 정밀광학기기업계 4위를 달리고 있다. 종업원수만 1만7,000명에 육박하는 이 회사는 감광재료, 정보기기사업을 축으로 삼고 있으며 특히 필름에서는 일본 내 2위를 차지해 왔다.창립(1928년)은 코니카보다 반세기 이상 늦었지만 오사카에 본사를 둔 미놀타는 카메라의 기술력에서 대형 선발업체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오토 포커스(자동초점) 기능이 부착된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80년대 초반 대히트시키면서 돈방석에 올라앉은 동시에 ‘기술의 미놀타’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자본금 258억엔에 2002년 3월 결산에서 5,108억엔의 매출을 기록한 이 회사는 외형 랭킹에서 올림포스광학에 이어 6위에 올랐다. 그러나 판매부진과 인건비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채 343억엔의 최종 적자를 냈다.일본언론은 마이너업체들의 반란으로 비쳐질 수 있는 두 회사의 통합을 시대와 환경변화에 굴복해 자존심을 포기한 대결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밀광학기기업계의 선구자 회사답게 필름카메라 시대에는 호황을 누렸지만 ‘디지털’이라는 시대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 한집살림으로 살길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흩어진 채 독자생존을 모색하다가는 얼마 더 버티지 못한 채 강자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디지털 및 네트워크화가 통합 재촉산업전문가들은 두 회사의 통합을 재촉한 원인을 카메라, 필름사업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 그리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대형전자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찾고 있다.“다른 회사에는 없는 매력을 가진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파고들겠다.”(코니카의 이와이 후미오 사장) “주요 기종에서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 대형업체들을 압박하겠다.”(미놀타의 오타 요시카즈 사장)지주회사 설립 형태로 오는 8월부터 한집살림에 들어갈 두 회사 최고경영자는 기자회견장에서 제품차별화를 통한 시장확대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언론은 이들 경영자의 다짐이 정밀광학기기의 빅3 업체를 겨냥한 도전장이나 다름없다고 해석했다. 통합으로 얻어질 시너지 효과가 우선 빅3 업체 추격에 쏟아질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빅3 업체는 시대 흐름 변화에 맞춰 기업체질과 사업내용을 변화시킨 카멜레온 경영에서 코니카와 미놀타를 압도해 온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특징이었다.캐논은 카메라사업이 한창 돈을 끌어 모으던 지난 80년대에 이미 정보사업에 눈을 돌렸다.컴퓨터와 액정사업에서 일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프린터와 복사기 등에서는 쾌조의 성장을 지속하며 강자기업의 아성을 쌓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나노테크(초미세기술)에서도 일본 최고의 특허 출원건수를 기록할 만큼 첨단기술 확보에서도 일본의 전체 산업계를 선도한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후지사진필름은 일본 필름 시장에서 공룡과도 같은 위상을 누려 왔지만 코니카보다 몇 발짝 앞서 변신에 성공했다. 필름카메라시장이 디지털화로 강펀치를 맞을 것이 분명하다고 내다본 이 회사는 9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디지털카메라사업에 도전, 지금은 일본의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넘버원’ 업체로 올라서 있다.리코 역시 예외는 아니다. 80년대에 디지털복사기를 개발해낸 이 회사는 카메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이 제품을 고수익사업의 뿌리로 집중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두 회사는 달랐다. 특히 코니카는 지난 86년 세계 최초로 컬러복사기를 만들어낼 만큼 앞선 기술력을 뽐냈지만 이를 시장개척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마케팅력 부족과 사업안목 부재로 황금시장 선점에 실패한 이 회사는 최근의 컬러 기술 경쟁에서 타 업체들에 뒤진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 미놀타는 컬러화 및 네트워크화 싸움에서 타 업체들을 뒤쫓기 바빴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전문가들은 짝짓기로 생존의 길을 택한 두 회사가 풀어야 할 최대 과제를 ‘복사기 빅3 업체의 아성 공략’과 ‘카메라 사업의 특화와 비중 축소’에 있다고 보고 있다. 캐논, 제록스, 리코 등이 장악해 온 틈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 생존영역을 넓힐 수 있느냐에 한집살림의 장래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특히 정밀기계기구와 광학기술 및 최신의 화학, 전자기술이 절대 필요한 디지털복사기의 경우 최첨단 제품 개발경쟁이 불꽃을 튀기는 분야인 만큼 업체간의 생존을 건 공방전이 불 보듯 뻔하게 벌어질 것이라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의 승부는 ‘고화질’ ‘고속’ ‘고신뢰성’의 ‘3고’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지적, 이를 뒷받침할 막대한 연구개발비도 승부의 관건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통합 영업이익 2006년 1,500억엔 목표코니카와 미놀타의 성장 젖줄 역할을 해 온 카메라의 경우 재래식은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게 일반적 중론이다. 하지만 디지털카메라의 앞길도 쉬운 것은 아니다. 소니, 파나소닉 등 하이테크를 앞세운 전자회사들이 시장을 선점하면서 전문카메라업체들의 설자리를 계속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카메라 역시 복사기 못지않은 거액의 개발비와 첨단기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지적, 두 업체가 어떻게 카메라사업 의존도를 낮추면서 특화된 제품을 내놓느냐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이들은 의료용 기기인 내시경에서 세계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올림포스광학을 본보기로 들고 있다. 리코는 카메라사업을 마니아, 전문가용의 특수제품으로 압축하고 나머지 여력을 정보기기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2002년 3월 결산에서 캐논에 못지않은 약 10%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코니카와 미놀타는 이번 통합으로 2006년 3월 결산에서 영업이익을 1,500억엔 규모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잉여인력과 조직, 부채를 축소하고 판매, 연구개발 거점을 통합운영해 효율을 극대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2005년까지 두 회사 전체 종업원의 10%를 줄이고 제조, 판매거점을 합쳐 연간 500억엔대의 경비절감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양측은 밝히고 있다.그러나 두 회사의 한집살림이 목표한 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와이 코니카 사장은 ‘살기 위해서라면 본업도 버린다’고 각오를 다졌지만 앞에 깔려 있는 길이 워낙 험난해서다. 한편 두 회사는 통합 후 카메라에서는 미놀타 브랜드만을 사용하되 필름은 코니카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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