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거침없이 드러낸 로맨틱코미디

호주 어딘가의 파티장에서 처음 만난 조시와 신. 실없는 파티용 잡담을 나누고 헤어질 수도 있었던 그들은 ‘우연히’ 같은 택시를 타고 귀가길에 오르게 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속 사진작가로 사흘 후 런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조시와 호주 도심의 붙박이(?) 처녀 신은 ‘뒤탈 걱정 없는 환락의 밤’을 상상하고 몸이 달아 오른 끝에 신의 침실(?)에서 뜨겁게 2차를 마감한다.전형적인 원나잇스탠드로 끝났을 수도 있을 이 관계의 끝은 돌아서려고만 하면 몸이 달아올라 다시 엉겨 붙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둘의 뜨거운 피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늦춰진다. 대개는 유쾌한 농담과 지략(?) 안에서, 때로는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장치 없는’ 섹스와 대화는 계속되지만 조시가 공항으로 떠나는 날이 오면서 둘은 처음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관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리게 된다.호주출신의 조너선 테플리츠키 감독의 데뷔작인 (Better Than Sex)는 2인 극을 보는 듯한 제한된 공간(신의 원룸아파트)에서 3일간 벌어지는 남녀의 격정적인 육탄전(?)과 모노드라마를 통해 연애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 섹스관(觀)의 견해를 섬세하면서도 거침없이 드러내는 로맨틱코미디다. 그래서인지 꽤 하드코어하다.맥 라이언이 장악한 기존의 ‘플라토닉한’(관객들에게 둘이 엉겨 붙은 침대시트를 걷어내주지는 않는) 로맨틱코미디를 예상한 관객들은 가 작정하고 날 것으로 드러내는 솔직함에 다소 당황할지도 모른다. (행인지 불행인지 국내 상영판은 본영화에서 10여분이 잘려나간 ‘클린 버전’이다.) 로맨틱코미디의 주체는 전통적으로 여성인가.는 조시와 신 양자에게 균등한 정도의 모노드라마를 할애하고 있지만 여주인공 신의 속내 이야기가 이 영화가 갖는 재미(혹은 생각할 거리)를 온전히 보장한다. 아시아인의 감식안으로는 인정하기 힘든 주근깨투성이에 좋게 말해서 ‘건강미’이지 퉁퉁한 서민의(?) 몸매를 가진 신은 ‘착하고’ ‘귀엽고’ ‘힘 좋은’ 조시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줄 안다.그리고 당연하게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한다. 조시가 철새처럼 런던으로 떠나면 섹스의 기억이 만연한 빈방에서 홀로 버텨야 할 사람은 그이기 때문이다. 조시 또한 신의 서비스(?)와 유머감각이 마음에 들지만 런던행을 취소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망설인다.서로 끌리지만 명철한 현실의식에 비하면 지반이 물렁물렁하기만 한 이 관계에 무언가 ‘초현실적인’(기적 같은) 조력이 필요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에 등장하는 오즈의 마법사를 빌려 온 듯한 ‘중매 팬터지’를 통해 보여주는 조시와 신의 마지막은 행복하다. 그러나 조금 더한 파격을 원하는 관객의 눈에 이런 해피엔딩은 게으르다.방백을 통한 심리묘사와 분망한 자기암시와 콤플렉스, 영화적 상상을 즉자적 리얼리티로 치환하는 기상천외함, 성차(性差)에서 기인하는 신경증적이고 코믹한 말싸움 등 가 보이는 다양한 장치들은 과 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그러나 기계적인 절충주의다. 는 여성화된(히스테릭한?) 남성 주체의 실연담을 통해 로맨틱코미디도 철학이 될 수 있음을 일찍이 보여준 우디 앨런에 비해 소외감이 들 정도로 순진하고 에 비해 ‘노출도’ 외의 성숙은 없어 보인다.만화 - 대중매체로서의 위상십중팔구는 악서리스트에 올라우리나라에서 만화라는 대중매체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예전보다 퍽 높아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같은 권위 있는 경제주간지에 만화칼럼이 실릴 정도니까. 하지만 한쪽으로는 아직도 만화계 관계자들을 ‘맥빠지게 하는’ 만화 경시 풍조가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만화를 무시했다 해서 동호인들이 울분을 토한 적이 있다. 국내 최정상급 개그맨 두 명이 사회를 보는 그 코너의 모토는 다름 아닌 ‘책, 책, 책, 책을 읽자’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법도 하다. 책을 읽자는 코너가 책을 무시하다니. 만화책도 엄연한 책이거늘. 사연인즉 이랬다.사회자가 길을 가는 아무나 붙잡고 묻는다. “책을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으십니까?” 한 권이라는 둥 두 권이라는 둥 대답 속의 숫자는 대부분 보잘 것 없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귀에 확 들어오는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닌가. 개그맨들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읽으십니까?” 엄청난 숫자를 말한 그 사람 가로되 “만화책이요.” 개그맨 두 명은 배를 잡고 웃었고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웃었다. 심지어 그렇게 말한 사람까지도 웃었다.사실, 이 정도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 싶다. 진행자가 웃었던 이유가 만화책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글자로 된 책’을 염두에 두고 물었는데 ‘그림으로 된 책’을 냅다 이야기하니 너무나 예상 밖이라 웃었던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심한 냉대를 받으며 피해의식이 어느새 ‘용가리’처럼 커져 있던 만화애호가들은 “만화책은 책이 아니냐? 왜 비웃느냐?”며 비난을 퍼부었다.만화의 위상은 각종 단체에서 선정하는 ‘이 달의 악서(惡書)’ 리스트에서도 잘 드러난다. 십중팔구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왜 악서에는 유독 만화책이 많은 걸까. 글자로 된 책 중에서도 나쁜 책은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SF소설의 80%는 쓰레기라는 사실에 동의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한 저명한 SF작가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동의한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지구상의 모든 대중예술의 80%는 쓰레기다.” 속내를 얘기하자면 악서를 뽑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고 싶다.나는 내가 알고 있는 자잘한 상식의 8할을 만화책에서 배웠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은 훌륭한 인류학 입문서라 해도 좋은 양서(良書)다. 같은 작가의 는 스케일의 규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데다 정교하기까지 한 스릴러의 모범답안 같은 스토리구조를 자랑한다.호소노 후지히코의 는 미술평론가 윤범모 선생이 일독을 추천할 정도로 수준 높은 미술 소재 만화다. 백성민 선생이나 이두호 선생의 흙냄새가 풀풀 풍기는 만화들을 두고 누가 악서라 할까. 만화라고 무턱대고 무시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화는 한도 끝도 없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나온 만화 중 20%를 모두 보여줘야 하니 끝이 쉽게 날 리 없지 않겠는가. 만화라고 무시하지 말자.김유준ㆍ에스콰이어 기자 yjkim@kayamedia.com이 주의 문화행사데레보의 ‘신곡’2월5(수)~9일(일)/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4시/LG아트센터/전석 4만5,000원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극이 국내 무대에 오른다. 안톤 아다진스키가 이끄는 극단 데레보(Derebo)가 무언 신체극인 을 선보이는 것.데레보의 은 단테의 사후세계여행을 다룬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경험하며 사랑과 평화의 깨달음을 얻는 단테의 과 달리 데레보의 에서는 이 모든 것이 혼합돼 있다. ‘우리 삶에 있어 더 이상의 지옥, 연옥, 천국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다.원형의 회전무대가 사면으로 둘러싸인 객석 중앙에 설치된다. 무대와 객석이 연결돼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은 배우들과 함께 호흡한다.2002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Fringe First’ ‘Herald Angel’ ‘Total Theatre Award’ 등의 상을 수상했다. 안톤 아다진스키, 엘레나, 타냐, 올렉 출연. (02-2005-0114)55size 500cc 5cup = 3월2일까지. 창조콘서트홀. 단식원에 모인 남녀들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엮은 창작뮤지컬. 극단 신화. 김영수 작ㆍ연출. (02-923-2131)에이브릴 라빈 콘서트 = 1월27일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 ‘컴플리케이티트’ ‘스키이트보이’ 등의 곡을 부른 17세 소녀 로커 라빈의 첫 내한무대. (02-399-5888)서울시교향악단 신년음악회 = 1월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브루흐 ‘콜 니드라이’(첼로 데이비드 코헨). 지휘 성기선. (1588-7890)보이체크 = 2월2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인간성 상실을 그린 게오르그 뷔히너의 대표작. 러시아 연출가 유리부드소프와 박지일 김호정 남명렬 윤주상 등의 공동작업. 춤이 위주가 되는 격렬한 무대. (02-580-1300)19 그리고 80 = 3월16일까지 정미소소극장. 자살을 꿈꾸는 19세 청년과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80세 할머니가 사랑에 빠진다. 콜린 히긴스 작, 장두이 각색ㆍ연출, 박정자 이종혁 출연. (02-3672-3001)미래로 세계로 = 1월31일까지 박영덕화랑. 백남준 조성묵 황영성 김창영 김찬일 도윤희 박광성 김순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02-544-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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