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 등 유명브랜드 ‘고성장 꺾였다’

24개 명품업체 지난해 매출신장률 6.6%P 하락...장기침체로 명품열기 시들어

일본은 구미 명품브랜드업체들의 천국이다. 도쿄의 경우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젊은 여성들의 대다수가 루이뷔통이나 샤넬, 프라다 브랜드의 핸드백을 손에 들고 있다.수년 전 긴자에 문을 연 에르메스 직영점이 몰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거나 주가폭락으로 일본경제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2년 9월에도 루이뷔통은 직영점 오픈행사에서 하루 동안 수억엔의 매출을 올렸다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소비자들의 무분별한 따라하기가 명품브랜드업체들의 배를 불려주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비판이 적잖지만 이 같은 지적은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상당수 젊은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핸드백, 구두, 액세서리는 명품브랜드 일색이고, 이들 물건을 살 돈을 벌기 위해 유흥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젊은 여성들도 적지 않다.이 때문에 명품브랜드업계에서는 ‘일본이 없으면 명품업체들이 모두 문닫고 말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며, 업체에 따라서는 전체매출의 절반을 일본에서 올리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지난해 가을부터 일본시장을 뒤덮고 있는 소비한파는 명품브랜드업체들의 ‘불패신화’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루이뷔통 등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부 업체를 제외하면 대다수 브랜드들의 매출이 서서히 뒷걸음질치고 있음이 역력해졌기 때문.지난 1월7일 ‘구치’가 도쿄 신주쿠의 한 빌딩 공간을 빌려 하루 동안 실시한 세일행사는 여러모로 많은 화제를 뿌렸다. 대형백화점들이 자사 신용카드를 소지한 우수회원만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열린 이 행사는 올해가 처음은 아니었다.하지만 지난해보다 행사장 규모가 훨씬 커진데다 가격할인 폭도 동종업계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할인율이 30~70%에 달했으며 일부 재고품은 할인율이 90%에 가까워 ‘땡처리’ 매장을 방불케 했다.명품브랜드업체 관계자들과 유통전문가들은 이날 행사와 관련, 구치가 크게 고전하는 것 같다고 짐작하면서도 이 같은 속사정이 구치 한 업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않거나 체면상 파격세일에 나서지 않을 뿐 판매부진으로 고민하기는 거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일본에 진출한 명품브랜드업계의 고성장에 제동이 걸린 것은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대형백화점에 매장을 내고 있는 24개 명품브랜드업체들의 전년 동기 대비 매출신장률은 2001년 가을(8~10월)의 경우 110.1%에 달해 디플레이션 터널에 갇힌 일본경제에 아랑곳없이 신나게 특수를 누렸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비율은 2001년 겨울(11, 12, 1월) 18.9%로 고개를 숙인 데 이어 2002년 가을(8~10월)에는 103.5%로 한층 더 내리막길을 달렸다.2만~3만원대 중가 제품으로 눈돌려명품브랜드업체들의 매출신장률은 매장증설에 따른 거품효과를 뺀 평당 매출을 기준으로 할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24개 업체의 전년 대비 평당 매출신장률은 2001년 가을 98.6%에서 같은해 겨울 115.9%로 급점프했으나 이 비율이 2002년 여름(5~7월)에는 93.9%로 단숨에 추락했다. 2002년 가을 97.6%로 소폭 회복되기는 했지만 전문가들은 최근의 시장상황과 업체들의 한숨소리를 감안할 때 겨울 실적도 신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명품브랜드업체들의 좋은 시절이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는 액세서리에서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절대적 인기를 끌어온 ‘티파니’의 케이스를 통해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이라는 영화의 주연여배우였던 오드리 헵번의 인기에 힘입어 일본시장에서 부동의 브랜드 로열티를 구축한 티파니는 매년 약 10%의 매출신장을 거듭해 왔다.그러나 동시다발 테러가 미국에서 발생한 지난 2001년 가을 이후 티파니는 기존 점포매출이 전년 대비 5~7%씩 후퇴하는 사상 초유의 이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티파니의 고전은 2002년 성탄절 특수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해마다 가장 많이 팔리던 4만~5만엔대의 선물판매가 급감한 대신 2만~3만엔짜리 중가상품이 선물시장의 중심을 차지하며 객단가 하락을 부채질했다. 명품브랜드업체들의 인기는 중고시장에서도 시들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오사카 한큐백화점에서 매년 2월 중고명품 판매행사를 대규모로 열고 있는 중고전문상 도쿄 미도리야의 고위 관계자는 시장여건이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는 “명품브랜드라면 이것저것 까다롭게 따지지 않던 소비자들의 태도가 2002년 2월 행사 때부터 많이 바뀌었다”고 지적한 후 “상품을 보는 눈이 특히 예리해져 올해는 한결 힘들 것 같다”고 걱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유통전문가들은 명품 시장의 열기가 식어버린 가장 큰 이유를 일본시장의 구조적 한계에서 찾고 있다. 나라 경제 돌아가는 사정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젊은 소비자들이 명품브랜드업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왔지만 고용불안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이제는 이들도 본격적으로 호주머니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는 분석이다.특히 2001년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가 터진 후 일본경제의 먹구름이 갈수록 더 짙어지고 주가폭락으로 사회분위기가 싸늘해진 것도 명품브랜드업체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소비, 마케팅 연구에서 독보적 명성을 자랑하는 야노경제연구소는 2002년 한해 동안 일본의 명품 수입 브랜드(시계, 보석 제외)의 시장규모가 약 1조3,046억엔에 그쳐 근소하나마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는 통계를 내놓고 있다.“최소 3~4개 브랜드 문닫을 것”명품브랜드의 인기퇴조는 백화점들의 수입감소와 함께 명품업체와 백화점간 역학관계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명품업체들은 백화점 매장을 빌려 쓰면서 수수료 형식으로 판매대금의 27~40%씩을 백화점에 제공해 온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다.하지만 이들 업체의 매출이 줄어들면서 백화점의 수수료 수입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아울러 명품업체들의 강력한 고객흡인력과 매출 견인 효과에 눌려 이들의 요구에 끌려다녔던 일부 백화점들은 이번 기회에 판세를 뒤집어 놓겠다고 벼르고 있다.오사카지역의 한 백화점 사장은 “명품브랜드업체라고 백화점에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공간만 차지하고 이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브랜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백화점과 명품브랜드업체간의 관계변화는 오히려 강한 브랜드 인지도와 자체 영업망을 갖춘 업체들의 백화점 이탈을 부추길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굳이 백화점에 들어가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고도 자체 매장에 찾아오는 고객만을 상대해 버텨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분하기 때문이다.패션유통컨설팅업체인 고지마패션 마케팅의 고지마 겐스케 사장은 최근의 이 같은 변화와 관련, “앞으로 일본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명품브랜드는 20개 정도로 한정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그는 일본이 황금시장으로 부각되면서 구미 명품업체들이 너도나도 일본에 법인을 설립하고 진출했지만 법인을 정상 운영하려면 연간 50억엔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재와 같은 불황이 계속된다면 50억엔이라는 최소한의 요건도 채우지 못한 채 문을 닫고 일본시장을 떠날 브랜드들이 적어도 3~4개는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다.이와 함께 그는 “살아남는 명품브랜드들간에도 가처분 소득이 높거나 일자리를 가진 여성을 고정고객으로 확보한 브랜드와 그렇지 못한 브랜드간의 명암이 극단적으로 엇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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