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임형 랩’ 증권사 자산관리업 첨병 노릇 기대 … ‘은행돈 100조를 노려’
입력 2006-08-30 11:54:50
수정 2006-08-30 11:54:50
“자산관리는 ○○에 맡기시고, 당신은 인생에 투자하세요.”광고가 쏟아졌고 문구는 화려했다. 때맞춰 문 열었던 증권사 지점의 인테리어도 광고 못지않게 휘황찬란했다.2년 전 봇물 터지듯 나왔던 이런 광고와 ‘특별한’ 증권사 지점들은 모두 ‘랩어카운트’(Wrap Account)라는 상품의 마케팅을 위한 것이었다. 랩어카운트란 증권사가 고객에게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고객의 투자성향에 따라 주식이나 채권 등에 대신 투자해주는 것을 말한다.투자자는 자산운용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고, 증권사는 브로커 업무에만 의존하는 수익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상품이라는 게 증권업계의 설명이었다.우리나라에서 랩어카운트는 지난 2000년 2월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름도 다양했다. 삼성증권의 ‘Fn 아너스 클럽’, 대우증권의 ‘플랜마스터’, LG투자증권의 ‘와이즈랩’, 현대증권의 ‘유퍼스트 멤버스’, 교보증권의 ‘노블레스랩’, 대신증권의 ‘사이보스랩’ 등. 시작은 화려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초창기 증권사들간에 경쟁이 붙어 판매 3개월 만에 증권사 총계약자산이 3조원에 이르기도 했다.하지만 이후 고객들은 등을 돌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1년 3월 말 랩어카운트 계좌 총액이 2조2,700억원이었고, 2002년 6월 말 2조2,691억원으로 줄었다. 이중에서도 삼성증권의 랩어카운트 자산이 1조6,289억원으로 전체의 71.8%를 차지했고 현대, 대우, LG투자증권 등 일부 대형증권사를 제외하고는 개점휴업 상태인 증권사도 속출했다. (수치가 의미를 잃었다고 판단, 금감원은 2002년 6월 이후 따로 집계를 하지 않는다.)그런데 이처럼 실패한 실험으로 여겨졌던 랩어카운트에 증권사들이 다시 한 번 승부를 걸고 나섰다. ‘패자부활’의 계기는 증권거래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마련됐다. 그간 증권업계에서는 정부와 감독당국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랩어카운트가 성공하지 못한 건 증권사 잘못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규제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이번 개정 시행령은 증권업계의 요구를 상당부분 반영했다.(돋보기 참조) 시행령의 골자는 사실상 허용되지 않았던 ‘일임형’ 랩어카운트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2000년 처음 랩이 도입될 때는 자문형으로 국한됐다.2001년 명목상 일임형이 허용됐지만 의무적으로 자산의 30%는 정크본드에 넣어야 하고, 주식 직접투자는 금하되 수익증권이나 뮤추얼펀드에만 투자하도록 했다. 때문에 증권사들은 ‘상품성이 없다’며 ‘제한적 일임형’ 랩 상품을 단 한 개도 출시하지 않았었다. 이제 제한 조항들은 모두 없어졌고, 일임매매식 주식 직접투자도 허용된다.증권사들은 랩어카운트에 관한 한 ‘승부는 지금부터’라며 단단히 채비를 하고 있다. 증권업계에서 구성한 태스크포스팀(TFT)의 일원인 증권업협회 김영돈씨는 “대형증권사와 투신전환 증권사들은 일임형 랩에 큰 기대를 걸고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약정경쟁 포기’를 선언한 삼성증권을 필두로 많은 증권사들이 거래수수료에만 의존하는 비즈니스모델에서 벗어나 종합자산관리형 영업으로 방향을 잡은 상황. 일임형 랩은 증권사가 제공할 수 있는 종합자산관리의 ‘핵심’이자 은행과 경쟁할 거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에 여기에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일임형 랩 시장은 얼만큼 성장할 것인가. 삼성증권 우성민 과장은 “제1금융권 등에 잠겨 있는 국내 금융자산을 800조~1,000조원 규모로 추산할 때 10%인 80조~100조원만 끌어와도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라고 시장을 우회적으로 전망했다.일임형 랩이 은행 등 타 금융권의 자산관리 서비스와 경쟁하자면 ‘수익률’을 전면에 내세우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랩어카운트를 준비 중인 삼성, LG투자, 대우, 한국투자신탁증권 등의 증권사들은 시스템 개발, 영업인 육성과 함께 질 좋은 운용인력을 확보하는 데 역량을 쏟고 있다.삼성증권은 이미 올해 ‘직군분류’와 함께 조직을 개편, ‘Fn 아너스 사업부’로 만들고 그 안에 랩 운용 부서를 신설했다. 대우, 미래에셋증권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증권사들은 ‘랩어카운트 재기전’에 대해 낙관적이다.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여전한 불법영업행위 등으로 이런 상태에서는 신뢰를 전제로 하는 랩이 정착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삼성증권의 황영기 사장이 불법적 영업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실제 불법이 있을 때는 매우 엄격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한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다.금융감독원 증권감독국 김신 조사역은 “일임형 랩어카운트가 상당히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면서도 “아직은 일반인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증권사는 한두 개에 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돋보기 / 개정안을 둘러싼 쟁점‘포괄주문 허용’ 등 뜨거운 감자2월19일 증권업법 시행령 개정안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고 2월 안으로 새 시행령은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시행령의 주요 내용은 △일임을 허용하고, △투자자산의 제한을 없애 유가증권에 해당하면 직접 개별주식이나 채권을 사든, 수익증권이나 뮤추얼펀드에 간접투자하든 모두 가능하며 △운용의 외부 위탁은(고객이 랩 계좌를 튼 증권사에서 직접 운용하지 않고 투자자문사에 아웃소싱하는 것) 허용하지 않고 △수익률이 매우 높았다 해도 성과보수를 받을 수 없도록 한 것 등이다.시행령은 확정됐으나 법해석의 문제를 둘러싼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증권업계는 수천, 수만개의 계좌를 따로 관리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여러 계좌를 모아 한꺼번에 주문을 낼 수 있는 ‘포괄주문’ 허용, 성과보수, 수수료율 등의 문제에 대해 최대한 회사쪽에 유리한 규정을 마련하고자 목소리를 내고 있다.증권사 실무자들은 실제로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금감원의 세칙이 마련돼야 상품출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금감원 김신 조사역은 “금감원 세칙을 만들 계획이 전혀 없으며, 증권사들이 투자자문업 등록만 마치고 나서 상품약관을 만들어 오면 그것을 심사만 할 것”이라고 말해 “규제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기려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