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안먹히는 좀비경제 심각

재정상 여유있는 나라는 ‘느긋’, 재정적자와 통화가치 높은 나라는 ‘조급’

요즘 들어 전세계적으로 정책무력화(Policy Ineffectiveness) 문제가 경제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일본과 같은 국가는 정책당국에서 경기부양을 목적으로 어떤 신호를 준다하더라도 경제주체들이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좀비경제 국면에 몰리고 있다.이미 국제금융시장에서는 통화정책의 반감론 혹은 무용론이 제기된 지 오래다.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함에 따라 금리인하와 총수요간의 민감도가 떨어지면서 케인즈언의 통화정책 전달경로(Transmission Mechanism, 통화공급 → 금리인하 → 총수요 증가 → 경기회복)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이제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추가적으로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국면에 몰리고 있는 점이다. 한 나라의 적정금리를 따지는 테일러 준칙(Taylor’s Rule) 등을 통해 금리수준을 평가해 보면 대부분 국가의 금리는 적정수준에 비해 낮게 나온다.극단적으로 부채 디플레 신드롬(Debt Deflation Syndrome)을 이용하기 위해 이미 적정수준보다 낮은 금리를 더 떨어드려 경기부양을 도모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마저 가계부채 부실과 같은 경제주체들의 현금흐름(Cash Flow)상 문제로 또 다른 부작용에 봉착하고 있다.더욱이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입지가 갈수록 약해져 종전처럼 소신 있는 행동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또 2001년 9ㆍ11테러 이후 ‘작은 정부론’에서 ‘큰 정부론’이 국민들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정책의 주안점이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넘어간 듯한 분위기도 중앙은행 총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나 생각한다.문제는 최근과 같은 증시와 경제여건하에서 경제주체들은 중앙은행 총재들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금리인하 정책이 아무런 효과를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정책실기론과 함께 올 들어 잇달아 중앙은행 총재들이 교체되고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이처럼 통화정책이 무력화됨에 따라 갈수록 재정정책이 경기부양수단으로 선호되고 있다. 크게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중국과 같이 재정상에 여유가 있는 국가는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부양을 도모하는 방안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처럼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세금감면을 마치 유행처럼 추진하고 있다.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방안 모두가 종전에 비해 경기부양효과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재정지출을 늘리는 방안은 그만큼 민간 부문에서 총지출이 위축되는 소위 구축효과(Crowding Out Effect) 때문에 경기부양효과가 반감되고 있어 주목된다.우려되는 것은 자국 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무력화 문제에 직면한 세계 각국들이 점차 인접국 혹은 경쟁국의 힘을 빌려 경기를 부양하려는 수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경제여건에 비해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중국과 같은 국가에 대해서는 평가절상을 요구하고 자국의 통화가치는 평가절하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이다.물론 이 과정에서 통화마찰이 불거지는 것은 당연하다. 올 들어 위안화 문제를 놓고 미국과 일본은 평가절상을 요구하는 반면, 중국은 이런 요구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위안화 문제를 놓고 중국과 일본간에 벌이는 통화마찰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한때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을 꿈꿨고 무역 흑자국의 상징이었던 일본이 악순환 국면에 몰리고 있는 것은 중국의 일본시장 잠식과 일본 내 제조업 공동화 현상을 야기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중국 이전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위안화 가치가 중국경제 기초여건에 비해 낮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 일본의 진단이다.완충능력에 따라 각국 명암 갈려실제로 실질실효환율, 환율구조 모형, 경상수지 균형모델 등 한나라 통화의 적정수준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위안화의 적정수준을 추정해 보면 달러당 6.8∼7.0위안으로 나온다. 이에 따라 일본은 중국이 시장잠식을 뛰어 넘어 ‘산업찬탈’(産業簒奪)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본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는 인식이다.따라서 일본이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경제여건에 맞게 위안화 가치를 절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절상하지 않을 경우 일본이 자체적으로 엔화 가치를 대폭 절하한다는 입장을 잇달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초 이후 엔저를 유도할 뜻을 계속 비춰왔다.반면 중국은 자국 내 디플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안화 가치를 절상하기보다 절하해야 한다고 일본의 요구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이 위안화 평가절상 요구가 강해질수록 이에 대해 중국이 감정적으로 대립할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시아 미래를 위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목이다.이처럼 중국과 일본간에 환율문제를 놓고 미묘하게 갈등을 빚는 시점에서 일본 시즈오카 재무상이 엔/달러 환율의 적정수준이 현 수준보다 약 30엔 정도가 높은 150엔∼160엔이라는 발언을 수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곧이어 구로다 재무차관도 엔저를 용인하는 발언을 해 비슷한 시각을 밝혀 중국을 자극하고 있다.문제는 중국과 일본간의 갈등과 특히 일본의 엔저 정책은 인접국들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엔저 정책을 추진해 개선된 경쟁력은 자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접국들의 경쟁력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만약 이런 특성을 외면하고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엔저 정책을 계속해서 고집할 경우 인접국과의 통화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접국들은 일본의 엔저 정책에 따라 경쟁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엔화 가치를 내린 폭만큼 인접국들도 자국의 통화가치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이론적으로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문제는 대표적인 ‘이웃 궁핍화(窮乏化) 정책’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어느 한 나라가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해 얻어지는 수출과 경제성장 측면의 이득은 인접국 또는 경쟁국들의 희생에 다름 아니라는 견해다. 최근처럼 글로벌화시대에 있어서는 가장 경계하는 정책수단이다.그렇다면 최근과 같은 정책무력화시대에 세계 각국들의 명암은 어떤가. 현 시점에서 재정상에 여유가 있고 경제여건에 비해 금리가 높거나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국가는 비교적 느긋하다. 반면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 경제여건에 비해 금리가 낮거나 통화가치가 높은 국가는 조급하다. 결국 완충능력에 따라 세계 각국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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