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ㆍ무역수지 동반 ‘적신호’

석유 소비 절약 '절실' ... 정부 "상황별 대책 수립 완료"

“이라크전쟁 발발 때는 석유시장 역사상 최대의 고통이 올 것이다.” 지난 2월 초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먼삭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함께 ‘최악의 오일쇼크’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WTI(서부 텍사스산 중질유) 기준으로 배럴당 30달러를 넘어 40달러 선까지 넘나드는 원유가격은 이라크전쟁 영향분을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며, 전쟁발발시에는 배럴당 10~15달러의 추가 상승이 예상된다는 게 해외 분석가들의 전망이다. 이라크전쟁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는 최악의 경우에는 배럴당 8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와 있다.최악의 오일쇼크 도래를 걱정하는 분위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원유시장이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각급 경제연구소와 증권사, 이코노미스트 등은 원유가격 상승과 경제지표의 변화를 연구, 이미 경제 전반에 대한 적신호를 켜 놓은 바 있다.고유가로 인한 생산활동 차질을 염려하는 기업들도 석유 에너지 절감과 원가인하 방안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정부 역시 “이라크전쟁이 단기에 종결되더라도 국제유가가 회복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고유가 영향 최소화’로 정책방향을 잡고 있다.“수급보다 가격인상폭이 문제”그러나 정작 일반 소비자의 위기의식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많다. 에너지전문가들은 “세계 6위 수준의 석유소비국을 구성하는 일반 소비자들이 오일쇼크 위기를 절감하는 게 경제 전반의 침체를 줄이는 최선의 대책”이라고 입을 모은다.우리나라는 에너지자원의 97.3%를 수입한다. 지난해 316억8,000억달러를 들여 수입한 에너지자원 가운데 원유는 191억6,000만달러였다. 휘발유, 등유 등 석유제품까지 합치면 총 251억3,000만달러로 전체 에너지 수입액의 79.3%를 차지했다.올해의 경우에는 원유가 1.3% 증가한 194억 달러, 석유제품은 0.6% 증가한 60억달러 수준이지만 에너지 수입액에서의 비중은 77.9%로 다소 떨어질 전망이다.국내에서 사용하는 원유는 대부분 중동에서 수입한다. 지난 80년에는 98.8%를 중동에서 수입하다 차차 비중이 줄어들어 지난해는 73.4%가 중동에서 들어왔다. 나머지는 동남아(17.3%), 아프리카(4.5%), 미주ㆍ유럽(4.8%)에서 조달하는 상황.이처럼 에너지자원에서 원유 및 석유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육박하고 지역적으로도 중동 의존도가 높은 만큼 이라크전쟁은 국내 에너지 수급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달러만 올라도 원유 수입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중동 산유국이 타격을 입으면 그 영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구조다.게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함께 중동을 오가는 유조선의 운항이 중단되거나,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발언대로 자국 내 유전과 접경지역 유전을 파괴하는 사태라도 벌어지면 그야말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국제유가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대로 뛰어오르면 원유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의 생산활동과 가정생활이 난관에 처하게 됨은 말할 것도 없다.여기에 베네수엘라 유전의 파업 후유증과 OPEC 회원국들의 증산여력 등을 감안하면 이라크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더라도 금세 시장이 안정화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다. 따라서 ‘쇼크’ 역시 장기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정부는 이 같은 관측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수급불균형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교적 ‘느긋’한 모습이다. 원유와 석유제품이 모자라는 문제보다 가격이 어느 선까지 오를 것인지가 더 큰 관건이라는 이야기다.배성기 산업자원부 에너지산업국장은 “미국의 경제상황, 이라크의 태도 등을 감안하면 전쟁이 단기에 끝난다 하더라도 걸프전 경우처럼 쉽게 원유가격이 안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히고 “그러나 이미 단계별 시나리오에 대해 대책이 세워져 있고 비축분도 넉넉한 편이며, 중동 산유국과 공급에 관한 확약을 해놓아 수급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실제로 오일쇼크에 대비한 국내 원유 및 석유제품 비축분은 3월12일 현재 97일분(국내 소비량 기준)이다. 한 척의 유조선도 오갈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97일 동안은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정부와 정유업계는 ‘전쟁이 아무리 악화된다 하더라도 3개월 동안 배 한 척 다닐 수 없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또 지난 1월 산업자원부 장관 등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을 방문, “최악의 수급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한국을 최우선 공급지로 삼는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더불어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최대고객’인데다 선박의 해상 봉쇄가 단행되더라도 미국이 원유소비국의 입장을 고려할 것이라는 게 ‘수급문제 안심’의 배경이다.한편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유가가 연 평균 1달러 상승하면 소비자물가는 0.15%포인트 상승하고 무역수지는 7.5억달러 낮아진다고 발표했다. 또 경제성장률은 0.10%포인트 저하되고 기업의 원가비용은 0.3%포인트 상승하며 국내 평균 유가는 0.7%포인트 인상요인이 발생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삼성경제연구소는 좀더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소비자물가는 0.17%포인트 상승하고 무역수지는 마이너스 10억달러, 경제성장률은 0.12% 저하된다는 것이다.해외 전문기관들이 예상하는 대로 올해 연 평균 유가가 지난해보다 배럴당 2~3달러 상승한다면 이 같은 경제지표 변동폭은 훨씬 커진다. 정부는 올해 연 평균 유가를 두바이유 기준으로 지난해 22~23달러에서 25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그러나 이미 2월 하순부터 10일 이동평균가격이 배럴당 30달러를 돌파했고 지난 2월25일에는 31.19달러까지 올랐다. 전쟁발발과 함께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급등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생산비 상승과 채산성 악화는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산업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가가 연 평균 10% 상승하면 전사업 평균 0.26% 안팎의 생산비 상승이 따르며, 특히 정유, 유화, 시멘트, 플라스틱산업이 0.2% 이상 크게 상승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화, 시멘트, 플라스틱, 섬유업종은 채산성이 가장 악화되는 업종으로 분류됐다.결국 원유가격 인상은 경제 전반에 심각한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정부는 3단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이미 가동에 들어갔다.지난 1월28일 발표된 정부의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경제안정화 대책’은 두바이유 기준 10일 이동평균가격 변화에 따라 3단계로 나뉘어 있다.이동평균가격이 30달러대에 있는 현재는 2단계 조치가 시행 중이다. 배럴당 32달러대까지는 29달러 선의 국내 유가가 유지되도록 관세, 내국세 및 수입부과금 인하를 추진하고 33달러를 상회할 때는 세금 추가 조정 및 비축유 방출, 수급 조정명령 등을 발동하는 게 핵심이다.1달러 오르면 물가 0.15%p 상승이미 석유수입부과금이 리터당 14원에서 4원으로 낮아졌으며 관세도 원유 3%(종전 5%), 석유제품 5%(종전 7%)로 인하했다. 또 자발적 에너지 소비절약에서 의무적 수요관리 조치로 전환, 에너지절약 인센티브제도를 가정ㆍ상업용에서 산업 부문으로 확대했다.배럴당 35달러를 넘는 3단계에 접어들면 추가 세제 조치와 유가완충자금 집행, 비축유 방출, 수급조정명령 등 가용수단을 최대한 동원하게 된다. 이때는 시중 석유가격의 추가 부담분을 시장에서 가격으로 흡수하게 돼 큰 폭의 기름값 인상이 단행될 소지가 높다.그러나 일련의 안정화 대책은 일반 소비자의 자발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김정일 산업자원부 석유산업과 사무관은 “우리나라는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영국 등 선진국보다 석유소비량이 많은 세계 6위 수준”이라며 “경제규모에 비해 에너지 사용이 너무 헤프다는 자각은 물론 가정에서부터 절약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INTERVIEW/ 배성기 산업자원부 에너지산업국장가정에서 10% 절약 “위기 피하는 방책”“정확한 예측이 어려울 때는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최선입니다. 고유가로 인한 경제, 생활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게 정부 대책의 골자입니다.”배성기 산업자원부 에너지산업국장은 개전과 동시에 24시간 비상대책반을 가동, 수급과 가격관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김동원 자원정책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비상대책반은 한국석유공사와 가스공사, 에너지관리공단, 정유사 등 유관기관이 동시에 참여하는 조직. 이미 상황실 마련과 근무조 편성까지 끝난 상태다.산자부가 유가동향에 특히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부터. 두바이유가 배럴당 25달러 선을 넘보기 시작하자 “심상찮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전쟁발발에 따른 고유가 대비책을 준비하는 한편 석유산업과에 상설 ‘에너지 비상수급 대책반’을 만들었다. 지난 1월에는 산자부 장ㆍ차관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을 방문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에도 원유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사실 수급문제보다 가격인상폭이 더 걱정입니다. 배럴당 35달러 이상 치솟을 경우에는 시장가격도 오를 수밖에 없어요. 가격이 뛰는 상황이 오기 전에 국민들이 조금씩 줄이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배국장은 일반 소비자의 위기의식이 약해 막상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했다. 정부가 시장가격을 최대한 억제하겠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원유와 석유제품을 100% 수입하면서도 아껴 쓰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가정에서 에너지자원을 10%만 줄이면 연간 32억달러를 절약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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