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인생 딛고 자수성가…김치냉장고 자체 개발

올해 상반기 중국 쑤저우에 에어컨 부품공장 건설 … 매출 목표 800억원

농사꾼에서 트럭조수, 그리고 운전수, 영업사원까지.김치냉장고를 만드는 (주)위트의 양만규 사장(59)이 그동안 해 온 일들이다. 절박한 인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실패를 모르고 살아왔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 그다.양사장은 10남매 중 다섯째로 충남 논산이 고향이다. 논산에서 초중고교를 나왔다. 그는 학창시절, 졸업 후 TV 고치는 기술을 배워 도시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면서 뜻을 꺾어야만 했다. 집안일을 맡아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시골생활에 정을 붙여갔다. 하지만 서울은 그에게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거머리에 장딴지가 물리고 뙤약볕에 얼굴이 그을리는 생활을 한 지 2년쯤 지난 1970년 초 그는 서울행을 결심한다. “어느날인가, 시골에서 쳇바퀴 생활을 하는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경, 형의 집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그는 우선 운전면허증을 따기로 했다. 그래야 TV를 고치러 다니기도 쉽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가 쥐어준 돈을 운전학원비로 다 쓰고 말았다. “무일푼이 됐을 때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그는 자존심 때문에 형에게 한 번도 용돈 달라는 말을 못했다.당시는 일자리가 많지 않았던 때라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도 취업이 쉽지가 않았다. 운전면허를 따고 잡은 일이 트럭운전기사 조수.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운전석 옆자리에도 못타고 대부분 짐칸에 타고 다녔다.그해 겨울 다행스럽게도 미아리에 있는 플라스틱 도매상의 운전기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8개월 동안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장부기록, 수금 등 주어지지 않은 일까지 했다. 그런 그를 사장은 신임했다.하지만 박한 월급에 그만뒀다. “사장이 3일간이나 집에 찾아와 함께 일하자며 붙잡았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그는 회고했다.당시 양사장의 영업실력은 따라잡을 만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71년 8월 동대문에 새로 생긴 플라스틱 도매상에서 일할 때다. 그는 6개월 만에 국내 플라스틱제품 도매상 중 두 번째로 많은 소매상을 확보했다.양사장은 자신의 영업력을 바탕으로 사업이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73년 초 0.5t짜리 3륜 트럭을 한 대 샀다. 플라스틱 사출을 하는 현진산업의 배송업무를 맡아 처음으로 사업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월 12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꽤 괜찮은 벌이었죠.” 그러나 73년 유류파동 때 개인사업을 접고 현진산업의 영업과장으로 3년간 보냈다.70년대는 보온밥통 시장이 인기를 누렸던 시기다. 그는 이때 공장을 세웠다가 얼마 후 문닫는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 보온밥통을 만들던 제일합섬에 플라스틱 사출제품을 납품하기로 하고 76년 소규모 공장을 세웠다.제일합섬과의 거래는 성공을 보증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불운이 찾아들었다. 공장을 설립한 그해 연말부터 불황이 찾아왔고 보온밥통업계가 줄도산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이듬해 5월 빚만 떠안고 헐값에 공장을 매각하고 말았다.국내 최초 172ℓ짜리 만들어한 번 맺은 플라스틱과의 인연은 질겼다. 다시는 플라스틱 일을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또다시 들어간 곳이 플라스틱 사출을 하는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대성플라스틱. 그는 망해가는 회사를 1년 만에 삼성전자 최우수 협력업체로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다.대성플라스틱에 다니던 83년 한여름이었다. 욕심 때문에 900만원을 주고 산 일본제 중고기계가 그를 사업의 길로 들게 했다. “중고기계지만 쓸모 있어 보여 사장에게 사자고 했더니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돈을 마련해 샀어요.”그는 기계를 산 김에 아예 공장을 임대하고 기계를 들여놓았다. 그리고 밤마다 기계를 뜯어 조립하고 기름칠해 수리했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고쳤고 직원을 뽑아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기계를 산 이후 1년 남짓 그는 대성플라스틱의 전무도 겸했다.양사장의 성공은 84년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등록되면서부터다. 삼성전자는 대성플라스틱과 거래를 하면서 양사장의 기술력을 인정하고 있던 터라 그가 운영하던 회사를 협력업체로 등록시켰다.이후 삼성전자에 냉장고용 얼음그릇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후 TV케이스, 모니터부품, 에어컨용 패널 등 품목을 늘려나갔다. 88년 수원에 1,15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는 등 사세도 빠르게 커졌다.외모와 달리 양사장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위험도 무릅쓰는 면이 있다. 지난 92년 일이다. 에어컨용 크로스팬(에어컨 실내기에서 찬바람을 뿜어내는 팬)의 불량이 너무 많았다.국내에서 해결방법을 못찾은 그는 일본업체에 기술이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산업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일본 도시바를 방문한 그는 이 회사의 협력업체 옷을 몰래 입고 들어가 현장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제품을 만들어냈다. “공장 내부를 둘러볼 때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양사장은 지난 99년 11월 김치냉장고(브랜드 위트)를 자체기술로 개발하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172ℓ짜리 초대형 제품을 만들어 출시했다. “당시 130ℓ가 최대 용량이었는데 172ℓ가 출시되자 김치냉장고 시장이 충격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처음에는 김치냉장고를 만들어 팔았다가 반품이 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제품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온도편차가 적고 저소음인데다 소비전력량이 다른 제품에 비해 30% 이상 적어 보냉효율이 뛰어나다고 회사측은 설명한다.특히 위트가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도입한 뚜껑 열림 멈춤 기능은 다른 업체들이 도입했을 정도다. 회사측은 경기도 화성에 70억원을 들여 지난 2001년 월 3만대 생산규모의 공장을 설립했다.위트는 삼성전자, 이마트 등에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지난해 자체 브랜드로 9만대를 팔았는데 올해는 13만대를 팔 계획입니다.”위트는 올 상반기에 중국 쑤저우에 200만달러를 투자해 1만평의 부지에 에어컨 부품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지난해 580억원의 매출을 올린 이 회사는 올해 8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031-35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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