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 아니다’ 중장기 대책 필요

디플레이션 현상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실 지난해 12월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의 물가는 안정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추가 금리인하가 거론되고 있다.과거에는 유가가 급등하면 세계경제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고민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의 현상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단기적인 경기순환과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는 구조적인 디플레 압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글로벌경쟁의 격화를 지적할 수 있다.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한 중국, 러시아, 동구 등 개도국의 저가품 수출 증가세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규제완화, 시장개방화가 가속돼 글로벌경쟁이 격화되면서 물가하락 압력이 확대되고 있다.둘째,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가격의 하락을 유발하고 있는데다 산업구조의 지식집약화가 중후장대 산업의 수요감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각국 금융시장이 글로벌하게 통합돼 금융시장의 변동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이러한 자산시장의 급등락 과정에서 기업 부도와 부실채권이 누적돼 금융경색으로 인한 디플레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개도국이 의욕적으로 설비투자를 늘리고 있는 한편 선진국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미진해 각 제조업에서 공급과잉 문제가 만성화되고 있다.이 같은 구조적인 디플레 압력으로 가장 고전하고 있는 것이 일본경제다. 중국의 부상과 값싼 중국제품 수입의 급증, 버블붕괴 이후의 금융경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9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계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독일도 주식과 부동산 등의 자산가격이 추락해 대형은행들의 수익이 악화되고 있으며, 일본형의 디플레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사실 에너지를 제외한 독일의 공업제품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0월 이후 계속 마이너스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미국경제도 유가상승과 이라크전쟁으로 소비심리가 급격히 악화돼 그동안 경기를 지탱해 온 주택경기가 위축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 미국 부동산시장의 버블이 이라크전 이후에 붕괴될 경우 미국경제는 경기의 재추락과 함께 본격적인 디플레 압력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결국 이번 유가 급등과 이라크전쟁은 세계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보다도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수요가 위축되는 가운데 원자재 비용이 상승했기 때문에 기업수익이 악화되고 설비투자 부진의 장기화나 기업부실화도 우려된다.한편 국내 경제는 단기적으로 보면 디플레이션 압력이 심각하다고 볼 수 없다. 올해 1분기 소비자물가는 4.1% 상승했고, 생산자물가지수도 5.8%를 기록했다. 국제유가의 급등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이 일시적으로 커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OECD 국가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완만한 물가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다만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에 작용하고 있는 구조적 디플레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경쟁이 심해지면서 교역재 분야의 물가하락 압력이 나타나고 있다.예를 들어 종합적인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GDP 디플레이터의 각 부문별 추이를 보면 수출이 지난 98년부터 2002년 사이에 29.6% 하락세를 기록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전자제품 등의 분야에서 중국발 디플레 압력 때문에 우리 제품의 수출가격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일본경제에 이어 독일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디플레 현상이 확산될 경우 우리 경제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기의 전반적 침체로 인한 수출부진과 물가하락 압력으로 인해 우리 경제의 성장세가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결국 우리 경제도 중장기적인 디플레 압력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제조업의 가격하락 압력을 고려해서 고가격을 기대할 수 있는 신제품이나 신기술 산업의 창업이 촉진돼야 할 것이다.그리고 디플레 현상은 금융경색으로 인해 조장되기 때문에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도록 자산시장의 안정화에 주력하는 한편 금융 중개 기능의 안정화와 선진화에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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