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겁니다”

반도체 클린룸용 패널시장 75%장악 ... 일본 방문길에 사업 힌트 얻어

“사랑으로 아껴준 아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남편 뒷바라지를 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 피곤할 텐데 언제나 밝고 환한 표정과 사랑으로 대해준 아내입니다.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겁니다.”쑥스러운 듯이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하는 삼우이엠씨 정규수 회장(59)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1970년 정회장이 한양대를 졸업할 당시 석유파동으로 한국경제가 위기국면에 처한 급박한 상황이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도 졸업과 함께 ‘백수’ 신세가 돼 대학도서관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도서관에서 외국 건축잡지를 보던 중 경량칸막이(파티션) 광고를 우연히 접했다. 그는 “바로 이거다. 경량칸막이를 만들어 팔면 큰돈이 되겠다”며 무릎을 쳤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도서관을 나와 집에서 작업을 시작했다.이듬해인 71년 9월 경량칸막이를 만들었고 빌딩을 찾아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탕치기 일쑤였다.“당시 경량칸막이에 대해 국내 시장에서는 인지도가 없었습니다. ‘벽돌로 하면 그만’이라며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고요.” 영업을 하면서 정회장은 합판 사이에 종이를 넣어 만든 게 무슨 벽체냐며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 와중에 결혼도 했다.지난 77년 법인을 설립해 사업이라는 것을 할 때까지 실업자 신세였던 그를 대신해 아내가 가장 역할을 했다. “대학강사 수입이라고 해야 생활비도 힘든 박봉이었죠. 겨울 추위에 장갑이 없어 튼 아내의 손등을 봤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어요.”해가 지나면서 경량칸막이를 찾는 고객이 늘기 시작했다. 물건이 팔리면서 자리도 잡혀갔다. 실업자 신세에서 벗어나 사업가로 변신을 하고 있을 때 불행이 찾아들었다.1981년 10월12일 회사설립 4년 만에 부도를 냈다.“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엔지니어로 열심히 일만했는데 부도라니.” 참을 수 없는 설움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는 수주를 위해 업체를 방문하고 현장에서 공사감독을 하는 등 바깥일에만 매달렸고 회사 살림은 전무에게 맡겼다. 그게 화근이었다. 제2차 석유파동이 몰아치자 납품업체들은 줄줄이 쓰러졌고 받아놓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됐다.부도 한 달 전부터 자금흐름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 업무를 모르는 그는 모든 것을 전무에게 의존했다. “전무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음발행을 늘리고 다른 회사와 어음맞교환을 통해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것 같아요.” 당시 부도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폐부로 느낄 때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고 그는 회고했다.부도가 나자 전무는 장부를 파기하고 “절대로 해결 못한다. 회사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채권단한테 맞아죽는다”며 정회장을 협박했다. 회사 내부 관리에 어두운 정회장의 약점을 이용해 전무가 회사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정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자해지를 작정하고 부도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채권단을 찾아다니며 빚을 꼭 갚겠다며 호소했다.며칠 후 채권단으로부터 “집 한 채밖에 없는 당신을 믿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는 너무 기뻐 가장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그는 전무를 퇴사시키고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코피 쏟는 줄도 모르고 철야를 하며 서류 파악에 매달렸다.그는 계속되는 밤샘작업으로 너무 피곤해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따끈한 욕탕에 들어앉아 있는데 상쾌해지면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현듯 스치는 게 아닌가. 우연찮게 얻은 ‘자신감’은 재기의 발판이 됐다. 이런 연유로 그는 목욕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그는 부도 이후 집에 들어간 날이 거의 없었다. 현장에서 잠을 잤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든가. 이듬해 1월부터 밀렸던 공사대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1982년 설날 이틀 전인 1월23일 빚을 모두 갚았다.그는 부도에서 벗어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2월 초 졸도해 10여일간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며칠 동안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했어요. 아내가 옆에서 많이 울더라고요.”정회장의 냉철한 불도저 정신은 부도난 이듬해 빚 청산과 함께 매출 60억원, 순이익 6억원의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정회장은 재기 이후 ‘댐식 경영론’으로 무장한다.1982년께다. 신문에서 읽은 일본의 마쓰시타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댐처럼 경영하라’는 내용의 글은 그의 경영철학이 됐다. 그는 “댐처럼 자금을 충분히 비축해 둬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엉뚱한 데 자금을 쓰지 말고 절약 비축해 놓아야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정회장은 호기심이 많다. 그가 반도체클린룸 시장에 뛰어든 것도 호기심에서 비롯됐다.지난 80년대 초 삼성전자의 해외 반도체공장 견학단에 끼여 일본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클린룸용 특수패널을 접했다. 먼지를 제거해 청정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클린룸용 특수패널은 반도체공장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다. 그는 일본 방문길에서 앞으로 반도체 관련사업으로 방향을 틀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그리고 일본에서 숨겨온 패널조각 하나를 갖고 3년 만인 85년 클린룸용 특수패널을 개발하는 쾌거를 올린다. 이때부터 정회장에게 사업운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반도체공장이 세워지면서 최대의 호황기를 맞았다.“당시 명절 휴일도 없이 24시간 풀가동할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삼우이엠씨는 국내 클린룸용 패널 시장의 7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지난 98년 뛰어든 건축외장재인 커튼월 사업도 매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정회장은 오는 2005년 개교를 목표로 지난해 6월 경기도 이천에 다산대학을 착공했다. 정회장이 존경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를 실현하겠다는 의미에서 학교명을 다산대학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학교는 아내에게 주는 정회장의 선물이다.“사업 초기 어려웠을 때 아내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천여고 교장으로 있는 아내를 다산대학 학장에 취임시킬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지만 올해 목표로 세운 매출 1,000억원과 순이익 60억원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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