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나이론필름공장 놓고 자존심 대결

‘상도의에 어긋난다.’(효성) ‘정상적인 상거래 행위다’(코오롱)고합그룹 소유였던 당진의 나일론필름공장을 놓고 효성과 코오롱이 벌이는 싸움이 점입가경이다.특히 이번 분쟁은 90년대 중반 양사가 한국카프로락탐 인수전을 통해 한 차례 감정싸움을 벌인 전력이 있는 터라 8년 만에 다시 벌이는 2라운드 성격이 짙다. 도대체 고합이 매물로 내놓은 당진공장이 뭐기에 두 회사는 1년여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분쟁배경은2002년 들어 고합 채권단(주채권은행 산업은행)은 당진공장의 매각을 결정했다. 이에 코오롱, 효성, 하니웰 등 7개사가 입찰에 참가했다. 그해 8월 고합은 효성보다 20억원이 많은 309억원을 써낸 코오롱을 우선협상대상자로, 효성을 예비협상자로 선정했다.이때만 해도 코오롱이 사실상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효성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코오롱의 독과점이 심화된다’며 우선협상대상자 선정과 관련, 이의제기 신청을 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채권단과 코오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각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문제가 종결되는 듯했지만 9월 초 필름가공업체 80여개사가 공정위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업계의 반발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면서 상황은 다시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코오롱은 9월30일 (주)고합과 본계약을 체결하고, 10월 기업결합신고까지 마쳤다.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12월 이번에는 공정위가 돌연 제동을 걸고 나섰다. 공정위는 “코오롱은 고합의 나일론필름 생산설비 중 가동중인 1개 라인 생산설비를 2개월 내 제3자에게 매각할 것”을 명령했다.의외의 상황에 놀란 코오롱은 공정위 명령에 대한 취소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냈지만 서울 고법은 매각기간을 올 2월27일에서 3월31일로 시한을 연기하면서 사실상 기각했다.코오롱은 3월 들어 공정위에 재심을 요청했고, 이 와중에 효성이 아닌 외국계 회사인 하니웰에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사의 감정은 더욱 격해진 상태다.고합 필름공장을 놓고 코오롱과 효성이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이유는 뭘까. 재계는 중견그룹인 코오롱과 효성이 시장 곳곳에서 주도권 경쟁을 벌이거나 마찰을 빚은 전통적 라이벌 관계임을 주목하고 있다.양사 모두 화섬이 주력으로, 물러설 수 없는 사이다. 특히 나일론필름은 수산물 등 식품포장재로 사용되는 기능성 필름으로 가스 차단성이 뛰어나고 음식의 장기 보존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양사가 총력을 기울이는 사업 분야 중 하나다.게다가 나일론필름은 성장속도가 빠른 성장형 업종에 속한다. 연간 국내 시장이 7~8%, 세계시장이 6% 이상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따라서 고합의 나일론필름공장이 어느 업체로 넘어가느냐에 따라 업계판도가 요동치기 때문에 양사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현재 국내 시장은 코오롱이 45.9%, 효성이 29.1%를 점유하고 있다(2001년ㆍ판매량 기준ㆍ공정위 자료). 고합은 13.1%로 3위다. 생산능력으로 따지면 코오롱이 연간 7,000t, 효성이 2,800t, 고합이 7,000t이다. 보통 라인 1개가 3,500t으로 고합은 현재 1개 라인만을 가동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코오롱이 고합을 인수할 경우 시장점유율이 약 60%로 늘어나고, 효성이 인수할 경우 42%로 증가한다. 그렇지만 코오롱이 당진공장을 인수할 경우 기업결합규정 위반에 해당된다고 판정한 공정위는 궁여지책으로 2개 라인을 코오롱과 효성이 나눠 갖도록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당시 공정위 관계자는 “코오롱이 가동설비를 효성에 넘기게 되면 양사가 45.9%와 42.2%로 변하게 된다”며 사실상 효성의 인수를 확실시했다.그렇지만 코오롱 입장에서는 가동라인을 효성에 넘길 경우 확고한 시장지배력이 흔들릴 수 있어 제3자에게 매각을 추진하는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이에 반해 효성은 가동설비를 인수하게 되면 코오롱의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어 역전의 기회를 맞는 셈이다. 후발주자인 효성 입장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경우다. 결국 양사가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팽팽한 양사 주장양사의 쟁점은 ‘합의’ 여부다. 공정위에서 양사가 효성에 설비라인을 매각하도록 합의했느냐는 것. 코오롱 관계자는 “구두로 협의는 했지만 합의는 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이에 대해 효성 관계자는 “기업결합신고가 부결될 경우 코오롱이 위약금 46억원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공정위에 중재를 요청했고, 이에 이남기 전 위원장과 양사 CEO들이 합의를 했다”고 반박했다.김석호 공정위 독점국 기업결합과 과장도 “당시 양사 CEO의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왜 서면으로 합의하지 않았을까. 이계호 (주)효성 화학PG 부사장은 “당시 공정위원장이 효성이 양해를 해달고 해서 어떻게 믿고 (양해를) 해주느냐고 하자 위원장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 구두로 합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코오롱 관계자는 “공정위는 상거래행위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 수 없기에 합의를 유도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고 지적했다.또 올해 초에 양사는 일정기간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결국 결렬됐다. 이 대목에서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코오롱 관계자는 “가격제시, 양사 공장방문, 양사 기술자와 실무자로 TF팀 구성 등 3가지 제안을 했지만 공식 답변이 없었다”고 한다.효성 관계자는 “실제로 양사 기술진이 공장방문을 진행했고 효성측에 MOU 체결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반박했다.현재 양사는 모두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지금 1개 라인을 떼어내 팔기는 경제성이 약하기 때문에 공장 전체를 팔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우리가 당진공장은 인수하면 세계 5위에서 2위권으로 뛰어오르는데 안타까운 일이다.”(코오롱)“공정위의 조정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당연히 예비협상대상자인 우리가 채권단과 협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저 공정위만 믿었는데 이렇게 당하니 억울하다.”(효성) 양사의 앙금이 쉽게 가라 않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돋보기 / 제3라운드는?스판덱스·타이어코드 시장에서 힘겨루기 펼칠 듯전통의 맞수 효성과 코오롱. 양사는 화섬시장의 양대 강호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부딪친다. 현재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타이어코드 등에서 효성이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다.특히 효성은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에서 세계 1위 자리를 확보, 1~2권 제품이 없는 코오롱과 비교된다. 따라서 코오롱의 입장에서는 고합 소유였던 나일론필름공장 인수야말로 세계 선두권 제품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게다가 대부분의 생산물량이 수출되는 상황에서 독과점 문제를 제기한 효성에 대해 ‘발목잡기’라고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효성 입장에서는 필름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지만 전망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냥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섬유시장 곳곳에서 충돌해온 양사의 다음 싸움터는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스판덱스를 든다. 애널리스트들은 “코오롱이 최근 스판덱스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해 효성 등 경쟁업체와의 접전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지난해 말 기준으로 효성과 태광산업, 동국산업 등 3강이 스판덱스 시장을 휩쓴 가운데 코오롱은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구미공장에 월 600t 규모의 생산라인을 신설 중이어서 효성과의 힘겨루기가 불가피하다. 아울러 효성이 1위인 타이어코드 시장에서도 코오롱이 올해 말 가동을 목표로 중국에 타이어코드 설비를 신설하는 등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화섬뿐만 아니라 수입차 시장에서도 양사는 부딪치고 있다. 최근 효성은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딜러선정 MOU를 체결해 95년 아우디 등의 판매업을 접은 뒤 5년 만에 재진입했다.코오롱은 87년부터 HBC 코오롱을 통해 BMW를 판매하고 있다. 효성과 코오롱의 다툼은 코오롱이 63년 나일론 원사생산에 나서자 동양나이론(효성)이 68년부터 같은 사업에 뛰어든 이후 35년간 계속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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