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조지 라플리 프록터&갬블 회장

‘외유내강’형의 CEO같지 않은 CEO

뉴밀레니엄의 첫해 2000년. 세계적 종합생활용품업체 프록터 & 갬블(P&G)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불안감으로 21세기의 시작을 맞이했다.1837년 동서지간의 두 미국인 프록터와 갬블이 신시내티에 양초와 비누제조업체 P&G를 창업한 이래 최악의 경영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P&G는 1891년 주식상장 이후 최대 규모인 3억2,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오랫동안 최고의 마케팅 사관학교이라는 명성을 누리던 P&G으로서는 보통 치욕이 아니었다. 2000년 6월6일 프록터 & 갬블 이사회는 당시 P&G그룹 화장품사업 부문 최고책임자이던 앨런 조지 라플리 사장(사진)을 그룹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했다.이날은 우연히도 라플리 회장의 결혼 30주년 기념일로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결혼기념일과 승진 축하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최악의 경영난에 빠진 P&G를 구해내야 하는 사명감에 그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라플리 회장은 취임 즉시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먼저 너무나 복잡한 체제로 구성된 조직을 단순화하고 사업부문은 세제와 유아용품, 미용, 건강, 식음료 5개 분야로 정리했다.이와 함께 글로벌 기업의 전략 실행에 가장 큰 걸림돌인 대화의 벽을 허물기 위해 사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쌍방향 수직ㆍ수평 방식으로 전환했다. 본사 경영진 사무실까지 상호간의 원활한 대화를 위한 구조로 재배치했다. 세계 120여개국에서 제품이 팔리는 글로벌 기업의 효율적 전략 수립과 실행을 위해서는 부서간의 벽부터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다.이와 동시에 브랜드 정리 작업에도 손을 댔다. 전임 더크 야그 회장의 시장선점 전쟁 무기였던 신제품 출시 경쟁정책을 과감히 포기하고 스타 브랜드 키우기 전략으로 전환했다. 전임자의 신제품 출시경쟁은 엄청난 개발투자 비용을 필요로 했다.또 신제품 출시 실패 때마다 2,000만~3,000만달러가 공중의 연기처럼 사라지는 바람에 누적적자가 늘어났다. 당시 과일 및 채소 스프레이 세제는 P&G의 가장 대표적인 시장 실패 케이스다.라플리 회장은 반응이 좋은 상품은 스타 브랜드로 만들며 장사가 안되는 제품은 시장에서 퇴출키로 결정하고 그룹 전체 매출액의 54%를 차지하는 14개 브랜드만 제외하곤 모두 정리했다. 신제품 출시에 드는 비용은 인기 브랜드 파생상품 생산으로 전환했다.미국 치약 시장 1위제품 크레스트치약은 동일 브랜드의 칫솔로 연결됐고, 1961년에 출시된 최초의 1회용 종이귀저기 팸퍼스는 유아용 물수건 파생상품으로 이어졌다.또한 그는 유럽역내 시장 동일가격제를 폐지하고 대형유통점에 주어지는 할인율도 구매량에 따라 조절하는 탄력적 정책으로 바꿨다.광고회사와의 관계도 과거 일정금액에 신제품 홍보 프로젝트를 맡기던 것과 달리 목표달성률이 넘으면 그 비율에 따라 보너스를 지불하는 추가 성과급 지불 계약제로 전환했다. 따라서 홍보업체들도 P&G시장 점유율 확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물론 라플리 회장의 경영난 타개 비상전략에는 1,800명의 대규모 인력감축이라는 구조조정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취임 3년 만에 흑자경영을 이뤄냈다. 올해 P&G 재무구조는 60억 달러의 캐시플로를 가질 정도로 튼튼해졌다. 주가도 2000년 57달러에서 85달러 수준으로 올랐다. 시장전문가들은 올해 P&G 매출액 성장률이 5~6%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P&G가 불과 3년도 채 안돼 적자경영에서 대규모 흑자경영으로 돌아선 것은 성공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미래사업 전략도 크게 한몫 한 것으로 분석된다. P&G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하며 동시에 미래사업 전략에도 손질을 가해 화장품과 건강사업 부문을 강화했다.아이보리 비누와 의류 악취 제거제 페브리즈, 세제 아리엘, 팸퍼스 기저귀, 얼웨이즈 생리대 등으로 더욱 유명한 종합생활용품 제국의 영토를 미용과 건강으로 확대하자는 미래사업 전략이다.“아무리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가정적이기는 해도 가정생활용품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미를 가꾸는 미용제품을 구입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게 라플리 회장의 지론이다.올해 화장품사업 매출액은 지난해 80억달러에서 50%가 증가해 120억달러선을 넘어섰다. 지난해 영양크림 올레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수분공급 기초화장품으로 기록됐다.세계 제1위 남성향수 휴고보스도 P&G 제품이다. 라코스테와 조이, 파투 향수 역시 P&G가 생산한다. 화장품 브랜드 커버걸은 러시아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 P&G가 독일의 헤어전문업체 웰라의 인수를 추진 중인 것도 헤어제품을 포함한 미용사업 강화 전략에 따른 것이다.생활건강 및 의약사업 역시 P&G의 중요한 미래전략 우선순위에 포함돼 있다. P&G의 연구개발(R&D) 투자예산은 연간 16억달러에 달한다.본사가 있는 신시내티에서 멀지 않은 교외의 메이슨에 위치한 R&D센터는 거의 약품회사 연구소 시설과 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탄생한 골다공증 예방약 액토넬은 6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올해 초 미국 CNN과 폭스TV는 프록터 & 갬블이 여성용 비아그라 개발성공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인트린사’로 명명된 이 제품은 미국 내 식품의약 관련 법적 절차 통과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할 때 당장 시판은 어렵다. 그러나 P&G는 인트린사 시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미국 내에서만 1,500만명 규모의 큰 시장이기 때문이다.지금으로부터 3년 전 라플리 회장은 P&G 최고경영권을 맡으며 ‘Organization 2005’라는 미래 전략으로 2005년 전까지 회사를 흑자경영으로 전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계획달성을 1년 반이나 앞당겨 이뤄냈다.지난 2월 미국 경제주간지 은 P&G를 ‘2003년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10대 기업’으로 선정하며 라플리 회장을 ‘CEO같지 않은 CEO’(The un-CEO)라고 말했다. 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에 앞서 남의 말을 경청하고 목소리가 부드럽고 조용한 라플리 회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카리스마적 최고경영자 타입과 달리 CEO같지 않은 CEO”라고 전했다.그렇다고 전세계 86개국에 진출해 10만2,000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P&G그룹의 최고사령관의 성격이 나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올해 54세의 해군장교 출신 라플리 회장은 겉보기와 달리 내적으로 아주 강한 외유내강형의 기업 전략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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